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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게 없었어. 없었다 뿐인가. 내 어머니는 초상화조차 탐탁지 않아 했지.

아주 어렸을 적에 귀부인의 거대한 초상화를 옮기는 인부를 본 적이 있네. 벨벳 천에 가려진 초상화 프레임을 보며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지. 그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감정이나 정령, 종교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에 화가들이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믿었거든. 그게 아니라도 살아있는 인물을 어딘가에 똑같이 모사하는 건 아주 불길한 일이라고 여겼지. 사람을 지나치게 닮은 것은 언젠가 스스로 의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려 한다. 너는 너를 똑 닮은 것이 살아있다면 어떨 것 같니. 그것을 잡아먹고 존재를 대신하겠다는 욕망을 품게 되지 않을까? 어머니는 예술은 예술답게 현실과 다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지. 그녀 자신도 연금술사이자 약사이자 그런 예술가였거든. 당시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네. 현실과 똑같은 것을 어째서 만들어 보존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늙으면 늙어가는 대로, 죽으면 죽음으로서 추억과 추모로 과거를 소중히 하고 나아가면 된다고 여겼지. 우리 모두 어차피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여행자가 아니던가. 불멸의 일족이 실제로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거야. 인간의 인식으로 붉은 달이 나를 뒤쫓아 방 창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어찌 감히 예상할 수 있었겠어.

 

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내게는 한 세기면 충분했다네. 어머니와 아비 다른 형제들의 표정이 어느 순간 기억나지 않게 되었어. 이제는 내 원래 눈 색이 뭐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아. 그러니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형제들의 낯을 유추할 수도 없는 일이지. 궁정 출신 화가들을 불러 그들을 그리게 했네. 내 얼굴을 보고 상상하여 그려보라고.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그러모아 그들의 성격과 분위기를 일러 주었지만 수십, 수백의 나를 닮은 얼굴들 속에 내가 아는 이는 없었다네. 그런데도 나는 그것들을 그러쥐고 살았어. 나폴레옹이 죽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멸망하고, 비행기란 것이 뜨고, 끝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계속. 그동안 루마니아에도 내란이 있었고, 마침내 현재에 이를 때까지 내 방에선 수십의 서로 다른 눈이 서로를 기이하게 응시하고 있었지. 세간에서 망각은 하늘의 축복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내게 망각은 지독한 저주이자 죄책감이야. 내 어찌 감히 그들을 잊을 수 있지. 홀로 살아남은 주제에,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끔찍한 환청에 시달렸고, 환각마저 보고 나니 한가지 확신이 들더군. 내가 비정한 존재라 일족의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지독한 자기혐오 속에 허우적대며 인간이고 동족이고 할 것 없이 모두를 미워하게 된 거지.

 

그런 내가 논에게 ‘그것’을 아느냐는 물음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했겠나. 깊고 어두운 공간에서 열차가 달려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두 팔을 치켜들었지.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덥고, 벅찬 호흡만이 귓가를 울렸을 뿐. 천천히 팔을 내리자,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보였네. 흰 천 안으로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지.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란… 수치심과 분노, 굴욕과 억울함, 애달픈 슬픔과 절망. 차라리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편이 낫지 않았겠나? <그런 것>이 있단 걸 알게 되는 것보단 덜 비참했을 거야. 나는 그곳에 오래도록 매여 있었다네. 몸도, 정신도.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지. 순간을 영구히 남길 수 있었더라면 시간의 무자비한 인도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순간의 포착으로 평생을 살 수도 있었을까. 그럼, 내 인생도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나는 두려워, 다니엘.

네 눈은 언제까지고 깊은 흑색일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겠어?

 

 

 

(2)

 

“디지털 카메라입니까.”

 

패키지 상자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다니엘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셰르반은 난생처음 홀로 마트에 가서 물건을 샀다. 전자기기 코너에 닿기까지 정확히 30분이 걸렸는데, 직원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걸 깨달은 덕에 카메라를 고르는 데에는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직원은 가성비 좋은 디지털 카메라를 권했으나, 그는 ‘흑백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다루기 편한 것’을 골라달라고 했다. 가격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에 직원은 아주 비싼 필름 카메라를 계산해 주었다. 초점 잡기 쉽고, 어떻게 찍어도 멋스럽게 나온다는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집사 노스페라투의 말을 들어 좋지 않았던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셰르반은 생각했다. 그는 마트 직원을 집사와 비슷하게 여겼다.

 

“필름이야.”

 

“직접 고른 겁니까?”

 

“…어.”

 

동봉된 제품 설명서를 읽느라 다니엘은 대답이 없었다. 왜인지 거짓말을 한다고 아주 약간의 버벅거림이 있었는데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혹은 알면서도 중요하지 않아서 넘어가 주는 것이거나. 셰르반이 꺼져있는 카메라의 셔터와 휠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다니엘은 설명서를 모두 읽고 내려놓았다. 지금 검지에 걸리는 그걸 세게 누르면 카메라 안쪽이 열립니다. 필름을 넣어야 사진이 찍히니,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필름을 꺼내는 건 당신이 하기 조금 어려울 겁니다. 현상해서 사진을 가져다 드리죠. 그러니 카메라째로 달라는 뜻이었다. 셰르반은 혹시 몰라 다시금 물었다.

 

“꼭 한 장만?”

 

다니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 장만.”

 

 

 

둘의 관계를 요약하자면 창과 방패. 연구자와 표본. 추격자와 도망자. 그리고 연인이자 부부다.

 

300년을 넘게 산 셰르반은 기억에 애로사항이 있다. 또한 잃어버린 가족을 향한 애착과 죄책감이 컸기에 그 오랜 세월을 살면서 절친한 존재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에 언젠가 누구든 가족처럼 잊어버리고 말리란 불안감 때문이었다. 늙다 못해 낡은 셰르반에 비해 새파랗게 어린 다니엘은 반대로 무엇도 잊지 못하는 비상한 뇌를 가지고 태어났다. 다니엘은 인터뷰를 통해 직접 셰르반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루마니아 성을 가득 채운 초상화를 코앞에서 보았다. 같은 인물을 그렸다는 설명과 달리 제각기 눈 색과 머리 색, 심지어 피부 색마저 다른 초상화를 두고 셰르반은 설명했다. 모조품 같은 이것으로 나는 수 세기를 버텼어. 그리고 앞으로 같은 세월을 더 버틸 수 있지.

 

당시엔 그 행동 기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월이 흘러 부부가 된 지금 다니엘은 그를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습관이 된 상실감. 전리품처럼 박제해둔 그리움. 극심한 불안감으로 관계를 시작조차 하지 못 하는 비겁함. 셰르반은 행복해질 때마다 상습적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고, 그런 주제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치게 다시 그리워 한다. 그래서 다니엘은 그의 손에 초상화 비슷한 것도 올려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한 장에 그는 보고 싶은 마음을 평생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다니엘은 셰르반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그가 필름을 끼우는 과정을 감상했다. 원래라면 한 장도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셰르반의 한마디에 한 장은 허용하게 되었다. 네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돼? 갖고 싶은데. 안 됩니다. 사진 말고 진짜를 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셰르반은 입술을 비죽이며 약한 소리를 했다. 일하러 나가면 못 보잖아. 휴대폰 배경 화면 바꾸는 법도 아는데, 이제….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독하기로 소문난 다니엘도 연인의 속삭이는 듯한 부탁에는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필름이 연결된 덮개가 닫혔다. 건전지를 밀어 넣고 전원을 켜자, 흡혈귀의 눈처럼 붉은빛이 카메라 위로 깜빡거렸다. 셰르반은 어색하게 파인더에 한쪽뿐인 눈을 가져다 붙였다. 그의 덜미 위로 다니엘은 고개를 기댔다.

 

“어디서 찍을 겁니까?”

 

“으음….”

 

두 번, 셔터 소리가 났다. 셰르반은 부엌이 나온 사진을 심각하게 돌려 보며 미간을 구기다, 다시 초점을 맞췄다.

 

“남자 친구 사진이라는 게 있대.”

“음?”

 

“잘은 몰라. 카페나 데이트하러 가서 찍은 남자 친구의 멋진 사진이라는 뜻 같은데, 그것도 생각했고.”

 

아마 그런 뜻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다니엘은 생각했다. 셰르반은 끌어안긴 채 엉거주춤 다리를 구부려 묵직한 삼각대를 꺼냈다. 카메라만 산 게 아니었군. 다니엘은 그의 뒷덜미에 코와 뺨을 한 번 문지르고는 삼각대 세우는 걸 도와줬다. 셰르반이 짧게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삼각대와 카메라가 바로 섰다.

 

“흑백이니까 너 조명 켜고 일하는 사진도 멋있을 것 같아.”

 

“흑백으로 고른 이유가 있습니까?”

“익숙해서. 흑백 영화는 예전에도 본 적 있거든. 그래서 익숙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고….”

 

말을 흐리며, 셰르반은 허리 숙여 파인더에 보이는 시야를 확인했다. 부엌이 보이던 아까와 달리 이제는 소파가 비스듬하게 보였다. 사진을 확인하자 초점이 잘 맞은 화면이 예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잿빛의 대비를 보며 셰르반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둘이 침대만큼이나 자주 엉겨 붙어, 잠들고는 하는 곳.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의 줌을 차츰 당기며, 그는 말을 흐렸다.

 

“사진이 실물하고 똑같으면 네가 불안해할 테니까.”

 

누군가의 잠든 모습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다. 어차피 들킬 사진이라 해도 셰르반은 우선 그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잠든 모습은 자연스러운 편이 좋을 것이므로.

필름 카메라는 예약해서 몇 초 후에 사진 찍는 거 안 되나? 휴대폰은 되던데…. 화면에 같이 나오면 좋겠어.

세상사 모르는 게 없는 다니엘은 대답 대신 두 손 가득 셰르반의 뺨을 쥐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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