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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星

   자동차 바퀴가 눈더미에 뒤덮여 헛돌았다. 산장 안을 돌아다니며 어렵게 타이어체인을 찾은 보람이 없었다. 타이어가 애꿎은 눈만 파내는 모습을 꽤 오랫동안 지켜보던 두 사람은 결국 자동차 시동을 껐다. 전조등이 꺼지자 자작나무와 눈밭이 연푸른빛 박명으로 뒤덮였다. 굵은 눈송이가 차창 위로 켜켜이 쌓였다. 엔야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나와 자작나무 틈새로 사라지는 하루를 지켜봤다.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린 나루세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엔야는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 둔 캐리어를 다시 현관 앞에 옮겨 놓았고, 나루세는 거실 테이블에 있던 비상용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엔야는 캐리어 바퀴에 낀 눈송이를 털어내고 거실로 들어섰다. 한참 잡음 섞인 소리를 내던 라디오에서 그제야 멀쩡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상 속보에 귀를 기울이던 나루세가 거실 소파에 늘어지듯 기댔다.
   “산장 어르신 말씀이 맞았네…. 오늘 차 움직이기 힘들 거라더니 뉴스에서도 똑같이 말해.”
   “폭설 주의보?”
   엔야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나루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빨개진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엔야 역시 붉어진 나루세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어르신 말씀으로는 내일 아침 전엔 그칠 것 같다고 하셨잖아. 여기에서 산장 운영을 오래 하셔서… 그런 감이 좋으시다고.”
   “응, 맞아….”
   나루세는 엔야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엔야는 차가운 나루세의 손 붙들고 느리게 주물거렸다. 꼭 그렇게 하면 손이 금방 따뜻해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루세는 문득, 충동적으로 삿포로 외곽의 오타루에 도착해 엔야와 손을 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장갑을 챙기지 못한 나루세를 위해 장갑을 파는 잡화점을 찾아다닐 때였다. 엔야는 그때도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나루세의 손을 데우려 했었다.
   “네가 풍경도 예쁜 숙소로 예약해 줬으니까… 난 그거 구경해도 좋을 것 같아. 다른 곳만 돌아다녀서 뭔가… 숙소 주변은 못 둘러보기도 했고….”
   엔야는 화제를 돌리며 나루세의 눈치를 살폈고, 나루세는 중간부터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차렸다.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엔야는 정곡이 찔린 얼굴로 나루세를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루세는 엔야의 손을 한 번 꾹 잡았다가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눈이 많이 쌓여서 걷기는 어려울 것 같고… 앞에서 눈 내리는 것만 보다가 들어오자. 레몬차 있던데 그거 타 올게.”
   고마워, 엔야. 고개를 돌려 엔야를 바라보는 나루세의 얼굴에는 개운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엔야는 부엌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나루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놓고 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지근한 나루세의 체온이 손바닥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엔야는 점퍼 주머니 속의 반지 케이스를 조용히 감싸 쥐며 나루세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엔야와 나루세가 삿포로로 여행을 온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정확히 하자면 그들이 처음 여행을 간 곳은 삿포로에서 조금 떨어진 오타루였고, 두 사람의 짐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치고는 많이 단출한 편이었다.
   그 시절, 졸업식을 앞둔 엔야와 나루세는 갓 어린 티를 벗은 시골 청년 같은 얼굴을 하고 도망치듯 오키나와를 떠나왔었다. 오타루의 겨울바람은 두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가지고 온 옷을 여러 겹 껴입어도 찬 바람은 옷감의 얼개 사이로 들어와 몸을 떨리게 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온기를 나눌 심정으로 손을 세게 맞잡았다. 오히려 붙잡고 싶은 손이 바로 곁에 있음에 감사한 사람들처럼. 떠나가는 꿈을 미련하게 붙잡는 사람들처럼.
   엔야는 산장 계단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며, 언젠가 나루세가 손을 붙잡는 것에 관한 일화를 풀어준 날을 떠올렸다. 나루세가 엔야의 침대에 함께 누워 밤을 지새웠던 날이었다. 나루세는 엔야가 오키나와에 돌아온 날을 회상하며 엔야와 깍지를 낀 손을 들어 보였다.
   “그날… 이렇게. 네가 버스 타고 가는 내내, 이렇게 내 손을 잡고 있었어. 잠들어 있는데도 그렇게 잡고 있는 게 뭔가 신기하고…”
   …좋았어. 나루세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중얼거렸다. 나루세가 곤히 잠들 때까지 엔야는 나루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요한 밤을 그대로 얼굴에 덮고 자는 사람처럼 나루세는 평화로워 보였다. 오키나와로 돌아온 날 네가 본 내 얼굴이 이랬을까, 엔야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깍지를 낀 손을 내려다보며 엄지로 조심히 나루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엔야가 점퍼 주머니 속에 든 반지를 사게 된 건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일상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엔야에게 있어 나루세와의 일상은 늘 특별했으므로, 그 어떤 날보다도 특별한 날이었을지 모른다.

   엔야는 방석을 가지고 와 현관 계단 앞에 놓았고, 나루세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 하나를 엔야에게 건네며 방석 위에 앉았다. 하늘에서는 입자가 고운 소금 같은 눈이 내렸다. 나루세는 손을 뻗어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 작은 눈송이를 지켜봤다. 엔야도 나루세를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가 뻗은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까보다 눈발이 약해진 것 같아.”
   “응… 조금 있으면 그칠 것 같기도 하고…. …이거.”
   엔야는 나루세에게 담요를 건넸다. 담요는 나루세의 배를 덮고도 그의 발끝까지 떨어질 정도로 크기가 컸다. 꼭 이불 같네. 나루세가 옅게 웃으며 농담하자 엔야는 민망한 듯 레몬차를 홀짝였다.
   두 사람은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히 산장의 풍경을 감상했다. 자작나무의 나뭇가지 윗면에는 그림자도 없는 새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나루세는 나뭇가지의 끝에서 꼭 하얀 결정이 자라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먼 설원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얇은 나뭇가지를 흔들자 뿌연 눈가루가 어두운 밤하늘 위로 휘날렸다.
   “뭔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눈을 보고 있어서 그런가….”
   전에 왔을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엔야가 머그컵을 쥔 채 중얼거렸다. 나루세는 담요에 앉은 눈송이가 물방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타루에 갔을 때?”
   “…그때도 밤에 눈이 내렸거든. 너… 자고 있을 때.”
   나루세는 서로를 끌어안고 잠들던 그 밤에, 저 역시 잠들지 못했었다고 말하려 했으나 지금에 와 꺼내기에는 민망한 말이 될 것 같아 함구했다. 대신 담요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쓸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정말 시간이 느리게 갔으면 했었는데…. 졸업식이 코앞이었으니까.”
   “응… 뭔가,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
   “기숙사 짐 챙기다가 말고 뛰어올 정도로?”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나루세는 엔야가 다시 레몬차를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을 바라봤다. 엔야가 민망한 마음에 괜스레 딴짓을 한다는 것을 아는 나루세는 피식 웃었다. 나루세는 엔야의 빈손을 슬쩍 잡았다.
   “전부 다 기억하고 있지. 그렇게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는 순간은,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네가 곁에 있는 게 안 믿기기도 해.”
   꼭 앞으로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생각에 잠긴 나루세의 얼굴에 문득 옅은 빛이 어렸다. 산장과 자작나무숲 위로 희미한 달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밤하늘의 눈구름도, 설원을 메우던 눈송이도 어느새 홀연히 떠나고 없었다. 청명한 겨울 하늘에 별들이 은은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우와, 작은 감탄사가 나루세의 입김을 타고 허공에 울려 퍼졌다. 엔야는 눈에 맺히는 별빛을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난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었어.”
   나루세가 시선을 옮겨 엔야를 바라보자, 엔야도 똑같이 나루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날은… ‘그날 조금이라도 네 얼굴을 오래 보다가 올 걸…’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데… 돌아오고 나니까 알 것 같더라고. 그날보다 너를 더 오래 보다가 갔어도… 난 네가 계속 보고 싶었을 거야. 나는… 지금도 종종 그렇거든.”
   너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나루세는 엔야의 눈동자에 맺힌 하얀 별을 본다. 하얀 별이 긴 꼬리를 끌고 까만 밤하늘을 사선으로 긋는다.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너랑.”
   나루세는 숨을 참고 커진 눈으로 엔야를 바라본다. 바로 다음 순간, 엔야는 비밀을 누설한 사람처럼 당황한다. 추위 탓인지 민망함 탓인지 모를 열기가 엔야의 얼굴을 덮친다. 나루세는 그것이 엔야가 예상치 못하게 제 진심을 꺼내 놓았을 때 보이는 반응이라는 것을 느리게 파악한다. 엔야가 시선을 굴린다.
   “장…난으로 꺼낸 말 아니야. 뭔가 더, 멋있게 해주고 싶은 말이긴 했지만…….”
   계속… 생각했던 거야. 엔야가 점퍼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 케이스를 꺼낸다. 케이스 안에는 투명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빛나고 있다. 나루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실감하지 못한 채 엔야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이르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면 나랑… …결혼해 주세요.”
   나루세는 천천히 눈앞에 놓인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자 이상하게도 그는 훈련 경기가 끝난 날 엔야에게 받았던 고백을 떠올린다. 붙잡아서는 안 될 사람을 보고 뒷걸음질을 치던 마음을, 결국 엔야의 손에 붙들려 덩달아 놓을 수 없게 된 마음을. 꽃향기를 들이켜듯 폐부로 숨을 잔뜩 밀어 넣고 서로를 보고 있던 그 순간부터 수년 동안 한결같던 그 마음을. 끝내 돌아오는 봄마다 티 없이 웃을 수 있게 된 그 사랑을. 걷잡을 수 없이 심장이 뛰면서도 눈물이 맺힌다.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와 나루세는 참지 못하고 울상을 짓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 먼저 말해줘서….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이제 계속… 내 옆에 있어 줘. 엔야는, 코끝을 붉힌 채 환하게 입을 벌려 웃는 나루세의 행복을 바라본다. 돌연 나루세의 울음을 체감한 엔야의 눈끝에도 눈물이 고인다. 나루세가 다가오는 행복을 끌어안듯 양팔을 벌려 엔야를 세게 안는다. 엔야는 나루세를 마주 안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울음을 삼킨다.
   “계속 네 곁에 있을게.”
   별들이 가슴에 남을 빛을 안고 먼 우주로 아득히 사라질 즈음, 산장에 드리운 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뗀다. 시선을 맞추는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사랑해. 눈을 접어 웃자 가느다란 눈물이 볼을 타고 유성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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