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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 8 ...
—A moment that changed my life.
Sophley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가족이었던 것 같다. 구시대적인 학교에서 낡은 시가지로 이어지는 긴 옥수수밭을 따라 두 사람이 거쳐온 세월은 어디로 흘러버렸을까. 언제까지고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아칸소주는 이제 과거의 유물이다.
소피아 마르티네즈는 미네소타로 떠났다. 첫 번째 결혼에서 도망친 해에. 마르티네즈가 일찌감치 남동생의 학비를 위해 병동의 당직을 서는 동안 레슬리 휴즈는 런던에 있었다. 레슬리는 코미디 클럽에 섰다. 방송사에 오디션 테이프를 보냈다. 어느 날엔 만취자였고 어느 날엔 재주꾼이었다가, 실패한 꿈을 가진 시시한 사무원이 되어 돌아왔다.
한때의 동창을 고발한 영상은 졸업생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중에서도 레슬리는 덕을 본 축이었다. 오 년 전에 뿌렸던 그 어떤 오디션 테이프보다 제약회사를 깎아내리는 냉소적인 인터뷰로 인상을 남겼다. 텔레비전 출연은 레슬리에게만큼은 좋은 계기가 됐다. 그가 마침내 엔터테인먼트 엔터프라이즈의 상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소피아의 경우는 달랐는데, 제약회사의 폐단은 그녀의 직업윤리와 밀접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생명 윤리는 소피아로 하여금 책임과 회의를 느끼게 했다.
긴 휴가가 있었다. 그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메꿔 줄 만큼 충분한 한 해가. 데미 휴즈가 언젠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제안했듯 세 사람은 캐나다를 거친다. 만년설을 오를 때 그들은 지금이 포토 북처럼 기억에 박제되리라고 동시에 알게 된다. 그리고 몇 번의 새벽 비행기가 미네소타와 할리우드를 오가고, 루이스 마르티네즈가 그해 최고의 루키로 뽑혀 옆집에서 파티가 열리고, 소피아가 간호사 대 환자 비율법 제정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마침내 일상을 되찾아 갈 때, 레슬리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가족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다 된 게 아니라면 지금이야.
그러나 레슬리는 전화를 걸게 된다.
「크리스마스 라이브에 출연할 거야.」
「게스트 제의가 왔어?」
「시청률이 높대. 이상하지 않아? 방구석에 앉아서 텔레비전 쳐다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니.」
「너무 그러진 마. 좋은 기회잖아.」
「방송이 끝나면 바로 갈게. 표를 바꿨어.」
「크리스마스에 텔레비전이나 챙겨봐야겠네.」
「그러지 말고 친구를 만나도 돼.」
크리스마스의 출연은 성공적이었다. 적당한 예의와 적당히 비꼬는 조크가 가미된 가족 방송이었으며 외로운 연휴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쾌히 시간을 투자해 줄 만한 수준은 됐다. 레슬리도 괜찮은 신인 역할을 해냈다. 그런 사람에게 흔히 기대되는 양식; 절박함에서 비롯되어 앞뒤를 재지 않는 방종함이 도움이 됐다. 과장을 보태 제2의 데이비드 레터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애프터 파티에서 샴페인 한 잔을 마시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택시를 잡아 공항을 향했다. 역시나 미국 항공사의 언제나와 같은 변수가 있었고, 비행기가 지연됨에 따라 그의 계획도 지연되었다. 대합실에서 시간을 죽이면서 방송용 메이크업과 차려입은 복장이 점점 지저분해져 갔다. 스탠드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했다 한들 야속한 시간이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스크린의 예상 이륙 시간이 자정을 넘겼을 때 레슬리는 이미 공항에서 한숨을 잔 상태였다. 그는 아예 연말로 계획을 바꿨다.
소피아는 한눈에 근면했다. 아직 크리스마스의 흔적이 남아있는 실내장식이 증거였다. 식사는 테이블에 모여앉아 함께하며,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고, 달력에 만나는 날을 표시하는 일상의 요식행위들이 삶을 비참하지 않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레슬리는 발을 닦고 들어오면서 대문에 걸린 리스와 거실에 놓인 작은 트리에 아는 척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데에 사과하는 대신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고 말했다.
소피아가 크리스마스 쇼를 챙겨 봤을까? 물어보지 못했던 건 그가 창피함을 알기 때문이다.
12월 31일은 좋지 못한 시기였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물론이고 컴퓨터 버그가 전산을 마비시킬 것이다. 세상이 호들갑을 떠는 반면에 소피아의 일과는 특별할 것 없이 돌아가지만, 레슬리는 얘깃거리를 놓치지 않았다. 만약 마지막 날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어야 했다. 기대와 실망이 끝없이 교차하던 지난날들에 대한 보상 같은 날이어야 했다.
그날 오후 두 사람은 전형적인 데이트를 보낸다. 박스오피스에서는 <재능 있는 리플리>가 순위권에서 상영했다. 그들은 중앙 좌석에 앉아 나란히 같은 방향을 본다.
끝장나는 스릴러였는데, 연인들이 보기 좋은 장르는 아니었다. 러닝타임이 진행될수록 레슬리는 점점 영화를 잘못 골랐다는 낭패감에 절었다. 세피아 빛 필름이 반짝거리며 천장을 지나가고, 스크린 빛이 부서지며 소피아의 옆얼굴과 코끝의 윤곽을 그렸다. 그가 영화 대신 소피아의 안중을 살피고 있자 소피아가 시선을 맞췄다. ‘집중해야지.’ 입 모양으로 레슬리를 타일렀다. “난 재밌었는데.” 극장에서 나오면서 소피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며 입을 닫고 있는 일은 나쁘게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는 어쩌면 리플리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초조함에 휩싸인다. 거리는 눈발 날린 흔적으로 신발을 더럽혔다. 설상가상 번듯한 레스토랑은 연말의 예약으로 오갈 데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저녁부터 문을 여는 선술집의 일등 손님이 된다.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레슬리는 용기가 필요했고 약간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저녁 사교를 위해 곁들이는 술 덕분이어야 했지, 술집에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부드러운 테이블보 위에서 반지를 꺼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자형 바에 앉아 짭조름한 프렌치프라이 따위를 먹으면서, 그는 주머니에 숨어있는 반지를 대체 언제가 되어서야 건넬 수 있을지 생각한다. 처음만 해도 그들뿐이었던 가게는 이른 저녁에 식사를 마친 사람들로 메워졌다. 밴드가 있는 무대는 아니었는데, 대신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의 앤썸과 박수로 떠들썩했다. 마이크가 비어 그들의 차례가 왔을 때 소피아는 카펜터스를 불렀고 레슬리는 아하를 불렀다.
댄스플로어에서 벗어나면서 레슬리는 대뜸 말한다. “묶은 머리가 어울려.” 소피아의 목소리가 카렌 카펜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머리가 약간 헤져서 빠져나왔고 얼굴이 붉었다. “항상 묶잖아.”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날 놀리는 거지?” 소피아가 손등을 가져다 대며 자기 볼을 식혔다.
그렇게 행동할 때 소피아는 열여덟 어린아이 같아서 레슬리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싶어진다.
찬 바람을 가르는 소피아의 걸음은 조금 휘청휘청했다. 모두가 그러듯이 두 사람도 새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거리를 배회했다. 시계탑이 있는 광장에는 사람이 농담처럼 많았다. 두 사람은 춤을 추는 것처럼 불안불안한 걸음이었다.
춤을 추는 것처럼. 과거에, 그들이 열여덟이고 현실에 패배하지 않았을 때에는, 서로의 파트너가 아니었고 대신 빈 교실 바닥에 주저앉아 기약 없는 약속 몇 가지를 했다. 레슬리가 하루빨리 그 지겨운 동네에서 벗어나 슈퍼스타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객기를 부리면, 소피아는 그곳 아칸소에 기다리듯 남아있으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그가 도망치듯 고향에서 떠났을 때는, 그녀가 고향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모두를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이 그 시골의 수많은 나쁜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던 그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리라는 태연한 낙관만으로 서로를 기억의 저편에 남겨두던 세월이 십 년을 넘어갔다. 서로를 가늠하기만 하는 동안 유년은 얼마나 바랬던가.
그렇다 해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아쉬움은 뒷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은 나란히 걷고 있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고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계탑의 너머의 새카만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마침내 군중이 생명의 기쁨과 새천년의 희망에 부풀어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한다. 10, 9, 8… 레슬리가 소피아에게 입맞춤했다. 술기운은 레슬리에게 약간의 솔직함을 북돋웠다. 7, 6, 5… 소피아가 입을 열자 짧게 프렌치키스를 한다. 4, 3, 2… 소피아가 레슬리의 목덜미에 팔을 감으면, 레슬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1, 0… 얼굴을 떨어뜨린 채 표정을 마주한다. 소피아는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12년 전에도 소피아의 웃음을 좋아했었다. 해피 뉴 이어… 사람들이 소리치고 그들도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다.
레슬리는 소피아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채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 준비했던 프러포즈 시나리오와는 전혀 달랐다. 헛웃음 나올 만큼 즉흥적이고 어설펐다. 그는 서툰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