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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왕의 흙 묻은 구두가 짙은 먹색의 주단을 밟는다. 빗소리를 듣던 우산을 접고 물기를 털어내면 바닥이 점점이 얼룩진다. “너무 매너가 없는 거 아니야?” 눈앞에는 싸구려 벨크로를 대충 붙인 샌들 하나만 덜렁 신은 남자가 서 있고, 천서왕은 이 발의 주인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런 곳에 초대한 당신만 할까요.” “엄밀히 말하면 내가 초대한 건 아니야.” 가지를 뻗은 것처럼 멋대로 자라난 철근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콘크리트 회벽. 페인트조차 바르지 않고 미감이라고는 모르는 거친 얼굴을 한 건물은 주인을 닮아 처음부터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을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낡고 스러져가는 장소에는 인간의 부속물 같은 것들이 무심하게 널려 있었는데, 대개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지언정 주영원은 이름을 제대로 호명하고 싶지 않은 듯 한쪽 눈썹만을 올려 불만을 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멋대로 찾아온 것으로 할까요.” 

전시회의 길은 하나로만 나 있고 주영원은 그림자처럼 천서왕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고 있다. 건물의 내부에 조성된 숲은 몇 년 전 댐 사업을 시작했다던 남자의 고향과 닮아 있었고 이제는 밑동만 남긴 채 황량해졌다곤 하나 이곳만큼은 과거에 박제된 채 여전히 무정한 녹음이 가득하다.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초록이 겹겹이 쌓여 흑색에 가까운 곳. 잎사귀에 밴 이슬의 냄새를 따라 나아가면 흐르지 못하고 고인 물 특유의 비린내가 너머에서 풍겨온다. 천서왕이 그것을 눈치챘을 때쯤 주영원이 입을 연다. “공포 영화에서는 호기심 많은 놈이 가장 먼저 죽는다던데.” 더 이상 나아가지 말라는 경고나 마찬가지임에도 천서왕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애석하게도 저는 이제 당신이 두렵지 않거든요.” 

너머에는 과거에 두고 온 줄만 알았던 저수지가 드러난다. 과거의 모습과 단 한 점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수면은 누군가가 돌을 던져도 파문이 생기지 않을 듯 고요하기만 하다. 모든 색을 삼킨 듯한 검은 물은 마치 아주 오랜 잠에 빠진 것만 같았는데, 들리는 소리 하나 없는 적요가 이 공간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저는 왜 이곳을 전시회라고 생각했을까요.” “네가 봐야만 하는 게 있었으니까.” 목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들린다. 하나 뒤를 돌아보면 무채색의 숲과 그림자만이 존재할 뿐 “주영원?” 목소리는 먹먹하게 묻힌다. 꼭 물에 잠긴 것 같이. “네 뒤에 있어.” 다시 뒤를 돌아보자 탐욕의 색을 빼다 박은 눈을 가진 사내 대신 갈라진 저수지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나 있었다. 계단의 아래, 흑백의 세계에는 빛과 어둠만이 존재하고 휴대폰의 플래시를 터뜨려도 까마득하게 먼 어둠이 천서왕을 부르고 있다. 

“나 여기 있어.”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자신을 내내 괴롭혔던 고향의 괴이가 재상영되는 것인지 여전히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 그러니 자신을 이곳으로 초대한 이가 보이려는 것을 망막에 아로새기기 전까지 도망칠 수 없을 터다. 그는 잘 다려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깊은 심호흡을 한 뒤 검은 암실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 천서왕은 물 아래에서 호흡하고 자신이 내내 밟고 있던 주단은 머리 위 일렁이는 검은 수면이 된다. 그 아래로 매끈한 갈고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다. 그것을 올려다보는 천서왕의 어깨 위로 가시덩굴 같은 손아귀가 얹어진다. 그것이 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왜 네가 혼자 여기에 있는지 잘 생각해 봐.” 천서왕이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외로움을 널어 만든 전시회의 저변에는 피붙이의 심장을 얻어 삶을 얻었다는 사실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유일한 가족, 유일한 이해자, 유일한 버팀목…….
당신에게 빛이 있었다면 그곳에 존재했겠지.

지금은 지저에 처박힌 채지만. 천서왕은 얇은 피부 아래로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낀다. 피부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불현듯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머리 위 갈고리들이 닻처럼 아래를 향해 뻗어진다. 수십 개의 쇳덩이가 눈앞에서 대가를 요구하고 불길하게 흔들리며 내는 금속성의 소음은 아귀의 목소리를 가증스럽게 흉내낸다. 

외로움이라는 것을 제게 알려주세요, 절개선을 따라 심장을 여세요. 지방층을 가르고 근막을 걷어내세요. 생명을 보여주세요, 흉골을 반으로 절단하세요. 당신의 약한 곳을 보여주세요, 매끈한 피막을 열고 꿈틀거리는 심장을 꺼내세요.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게 해주세요. 이제 저를 삼키세요, 텅 빈 곳에 제가 들어가게 해주세요. 네 꿈에 내가 나오는 이유를 나에게도 알려 줘. 그리고 같은 꿈을 꾸게 해 줘.

간신히 메워놓은 상처의 틈은 파고들기 좋게 벌어져 있고 그 안으로는 맥동하는 심장이 보인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생명은 금방이라도 피막을 찢고 자신이 아닌 것이 멋대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는데, 그것을 꺼내 두꺼운 혈관 사이로 고리를 꿰어 걸어놓는 순간 천서왕은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낀다. 왼손을 쓰는 법이나 담배의 향, 더 이상 친형의 모습을 한 망자가 자신의 꿈에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선뜩한 예견 같은 것. 도로 주워담을 새 없이 고리는 빠르게 수면을 향해 올라간다. 가장 뜨거운 것을 바치고 남은 것은 사무치는 한기와 외로움. 홀로된 천서왕의 눈앞에는 덩그러니 놓인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

 

사위를 가득 채우던 물비린내는 더 이상 풍기지 않는다. 대신 코가 멀 만큼의 짙은 프리지아 향기가 천서왕의 피를 흠뻑 머금어 만개하고 있다. 머리 위 검은 장막은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균열 틈으로 빛이 내려앉는다. 천서왕은 노란 프리지아 꽃을 몇 송이 꺾고서는 공중전화 위에 올려 있는 수화기를 들었고, 부드러운 장막은 전화부스 위로 내려앉는다. 낙전이 남아 있는 구시대의 유물,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것. 아직도 안테나를 세워 쓰는 전화기를 사용하는 누군가를 닮은 아날로그 기계. 그는 알고 있는 번호를 누른다. 이내 신호음은 울리기 시작하고 

종막의 문이 열린다. 꿈에서 빠져나왔으나 물속에 아주 오래 잠겨 있었던 듯 묵직한 몸 탓에 머리맡에 울리고 있던 진동조차 신경쓸 겨를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매일 아침 사무치던 설움이 천서왕의 속을 헤집어놓지 않았다는 것. 갈비뼈 아래 자리한 것이 그를 충동질하며 전화기를 주워들게 만든다. 발신자의 이름은 액정 위로 떠 있지 않지만 그가 신발의 주인을 알고 있었듯 자신에게 몰래 손 내민 사람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이내 흐르는 것은 음질이 좋지 않은 통화의 노이즈 사이, 어둠 틈에 생긴 얄팍한 균열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 같은, 아주 나약한 온기를 담은…….

 

“만나러 와.” 주영원이 천서왕을 부르고 있다. 외로움이 옮은 목소리로¹. 

¹ 어디에서 걸려온 전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서든 두 사람은 만나게 될 테니까. 
주영원이 바라고, 천서왕이 응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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