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글렀군.”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우성을 뚫었다. 예고 없는 호우가 내리고 있는 탓이다. 일정이 여러 사정으로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만 때로는 채비를 모두 마친 직후의 비는 그저 황당하기만도 한 것이다.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고… 그러면 뭘 한다. 시간 공백 채울 거리를 고민하며 무에르테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꽃이 흔들리고, 도막이 반쯤 타들어 갈 즈음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영화나 보시겠습니까?” 무에르테가 권하지 않으면 굳이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곁에 멍하니 서 있던—함께 일정 우천 취소 당했다—크리스가 자약하게 제안했다. “그러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무에르테가 담배 끝 재를 털어내며 대답한다. 어디서 영화를 볼지, 혹은 무엇을 볼지에 대한 논의는 없다. 크리스의 거처 한쪽 책장에는 비디오테이프 컬렉션이 쌓여 있고, 무에르테는 몇 번이고 그곳에 방문한 적 있으므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게에 들렀다 가지.”
거실의 낮은 테이블에는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는 알루미늄 맥주 캔이 놓였다. 본래 두 캔을 사 왔으나 크리스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는다. 무에르테는 그가 이전에 술 마시는 것을 보아서 알고 있다. 두어 모금이라도 입을 대었다가는 이것이 아무리 밍밍한 편의점 맥주라 하여도, 크리스는 영화의 상영 시간보다 길게 잠들고 말 것이다. 남은 하나는 냉장고에 들어간다. 누군가 마셔줄 때까지 남아있을 테다.
영화는 그저 볼만하다. 잔인함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뇌, 심장, 척수와 피, 붕괴한 피부 따위의 것이 속속들이 비춰진다.—좀비물 마니아인 크리스의 VCR 컬렉션에는 이런 물건밖에 없다—물론 무에르테로선 작전을 수행하며 크고 작은 괴물을 통해 이미 살갗으로 경험했던 내용이다. 사람에서 좀비로의 전환에 성공한 한 사체의 몸에서 창자가 쏟아져 내렸다. 신체와 동화되어 생리적 기전 일체를 공유받는 무에르테의 기생체가, 그 폭력적인 공기를 느끼고는 피부밑에서 움찔거린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균열을 내어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것들의 숙주가 과격한 존재감을 허락지 않는 까닭이다.
제법 그럴싸한 구석도 있었으나 구식 영화의 과장된 연기와 분장 덕에 조잡하다는 감상이 지배적이다. 팔짱을 낀 채 눌러앉은 몸이 나른해지면서 서서히 눈이 감긴다.
일어났을 때는 텔레비전 소리가 다소 줄어 있었다. 끝을 향해가는 영화 속 도심에는 버섯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고. 저 세계에도 사냥꾼이 있었다면 좀 달랐을 테지. 막 낮잠에서 깨어나 어두침침한 눈이 바로 옆의 사람에게서 흐린 불빛을 잡아낸다. 비샤리아가 부목을 대어 둔 흉과… 피학적 대리만족을 욱여넣어 생긴 푸른 혈색이 뺨과 귀에 비쳐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해 보인다. 무에르테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
치료를 시작한 이래 크리스는 물리적 상해를 얻을 기회를 잃었다. 파트너도 그를 그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다. 크리스에게 남은 해소 방안은 치료자가 허락한 몇 가지 한정적인 쾌락과, 한참 모자라나마 스스로 얻기에 쉬운 간접 경험이 전부다. 영화 속 좀비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몰입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집에서는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늘 무기를 쥐고 있던 그가 두 팔을 가만히 둔 채 편안해진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무에르테는 말을 거는 대신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넘어가는 엔딩 스크롤을 기점으로 경직된 시체마냥 미동 않던 크리스의 굳은 등과 어깨가 풀어지고, 그는 서서히 상체를 틀어 시선이 느껴진 방향을 돌아본다. 그래서 무에르테는 크리스를 집어삼키던 화면으로부터 그가 벗어난 것을 알았다.
무에르테는 한두 걸음 너비의 소파 끝에 기댄 채 손을 들어 크리스에게 신호한다. 이리로. 그리고 더 가까이. 손가락의 까딱임이 세 번을 넘기 전 거리가 부쩍 좁혀진다. 일인용 소파에 둘이 앉은 꼴인 양, 허나 무리 없이 지시를 따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무에르테는 크리스의 턱을 감아쥔다. 거부반응은 없다. 무에르테 휘하에 적을 옮겨 긴 반항기를 지난 후 순응인지 적응인지 어느덧 순순해진 크리스는 물끄럼한 시선을 곧추 받는다. 비샤리아를 제거하기 시작하고서 몇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기생충의 둥우리가 머무르는 그의 왼눈에서 푸른 움직임이 튄다. 치료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그 말은, 파트너로서, 또한 치료자로서 크리스를 적절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에르테는 사뭇 진지하게 다물린 그의 아랫입술 위로 엄지를 누른다. 신경 써 관리하지 않아 부드러운 사포를 닮은 촉감이다. 입술 틈을 비집어 들어가면 습기를 머금은 숨이 손마디로 스며든다. 일전 처음 손을 댈 적 극심하던 저항에 비하면 양호하다 못해 그 시절을 잊은 듯한 반응이다.
무에르테는 세월로 크리스를 밀어붙이고 있다. 현 시점에는 연 단위로 세야 하는 예전, 크리스의 과거를 읽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올 적부터 그에게 긴 시간을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쓸쓸하고 음울한 일식이 하늘을 덮었던 그날은 마치 오늘과 같은 어두운 조도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 너머를 감싸던 돌개바람과… 두 사람을 세계로부터 서서히 분리시키던 기류가 있었고, 내밀어진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면서도, 이런다고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더듬어 들어간 궤적에는 패인 요철을 가진 혼이, 또 먼지 쌓인 믿음의 돌 위에서 그를 켜켜이 쏘아온 총소리가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마냥 요란한—
—탕, 묵직한 빗방울이 닫힌 유리 창문 위로 온 힘을 다해 부딪힌다. 반쯤 발을 걸치고 있던 옛 헤아림에서 무에르테가 돌아온다. 크리스는 몸을 기울이고 무에르테에게 집중하고 있다. 세찬 빗소리를 뒤로 한 채 다음 행동을 채근하듯 치켜든 엷은 눈썹이 보인다. 그것이 의문을 품는 얼굴처럼 느껴져서 무에르테는 손을 거두고자 한다. 허나 평균에 비해 날카로운 치아가 혀 위의 엄지를 가볍게 물어 긁자, 문득 미풍 같은 떨림이 뒷목을 스쳤다. 기시감 드는 바람처럼. 현실감을 다소 탈각하고 땅으로부터 유리시키는 기류처럼… 무에르테는 크리스의 턱에서 손을 떼어낸다.
그러나 곧, 손아귀를 뻗어 크리스의 허리를 감싼다. 힘이 들어간 손마디에는 더 이상 머뭇거림이 없다. 이내 비디오테이프는 역할을 다했다는 듯 재생을 마친다. 유일한 불빛이라 부를 수 있는 텔레비전 화면에 마지막 스텝의 이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머잖아 지척에 올라온 크리스가 얼굴을 가볍게 옆으로 튼다.
찰나 촛불을 분 듯 광원이 꺼진다.
이제는 두 사람분의 윤곽을 그리는 푸른 자국만이, 어둠 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