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花は根に鳥は古巣に
깨어나고 보니 정오에 다다른 무렵이었다. 얼핏 선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으나 세 시간 넘게 단잠에 빠져있었다. 장갑을 낀 손으로 눈꺼풀을 매만졌다. 다행히 화장은 번져있지 않았고 저택을 오고 가는 사용인들이 사뭇 분주했다. 노아가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상체를 가지런하게 세웠다. 어깨에 기대어 있던 모네가 그 기척을 알아채고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았다. 근처에 있던 탁자에 영어와 일본어로 된 읽을거리가 적당히 쌓여 있었다. 새로 마련한 저택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거의 보인 적이 없어서 노아는 반사적으로 모네를 바라보았다. 아직 멀었다고 하던가요? 코르셋으로 조여진 허리가 조금씩 불편해졌다. 곱고 둥글게 단정한 머리카락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연광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 근처로 고개 숙인 모네가 입술을 붙여왔다. 안 그래도 말해놨어요. 폭양이 내리쬐기 이전에 끝내고 싶다고요. 당신은 열기에 약하잖아요. 서늘한 손길이 가느다란 속눈썹을 쓰다듬었다. 노아가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반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잔잔하게 나부끼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비단으로 잘 짜인 커튼처럼 미끄러졌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결혼하기 좋은 날이었다. 구태여 헤아리자면 친인척은 물론이고 예식장도 마땅치 않아 혼인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갖춰 입은 신부는 오로지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면을 덮은 드레스의 끝자락만 봐도 도무지 비슷하다고 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섬세하게 관리해왔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스며든 빛깔은 아주 희게 보이지 않았다. 이십 대에 각자 웨딩드레스를 맞춰 입고 서로 다른 버진 로드를 걸었으나 삶에서 처음 겪어보는 순간 같았다. 근처에 앉아 손을 맞잡은 반려는 인생의 중반기를 거쳐 운명처럼 마주한 상대였고, 처음 맺은 백년가약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런 장신구 없이 비어있는 왼손 약지가 오히려 기꺼운 이유는 분명 여기에 있었다.
복도 너머로 들려오는 발소리가 규칙적이지 못하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드물게 ‘주인님’이나 ‘마님’이라며 두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 들려왔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노아가 먼저 예감했다. 슬슬 일어날까요? 하며 왼손을 내밀자 모네가 익숙하게 오른손을 얹었다.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보폭이 좁아졌다.
나선형으로 된 층계를 내려가면 문간까지 일직선으로 길이 나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손가락으로 조심히 들어 올리자 이슬을 머금어 조금 웃자란 잔디밭이 보였다. 오로지 화원을 위하여 조성된 공간이었다. 한가로운 봄날이라 하더라도 사계절 내내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꽃부터 교배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품종까지 다양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이 서너 명 정도 따라붙었다. 길게 늘어진 밑단을 양손으로 수습하여 걸음이 얽히지 않도록 조심했다. 탁 트인 정원 중심이 벌써 자연광을 받아 환하게 눈이 부셨다. 사시사철 벚꽃이 만개하도록 관리된 벚나무 한 그루가 거기에 심이져 있었다. 집사장이 직접 고개를 숙여 웨딩 촬영이 전부 준비되었다고 소식을 알렸다. 노아가 나란히 서 있는 모네와 다정하게 시선을 교차했다. 여전히 그 작은 손을 맞잡은 상태로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이하고 낮은 언덕을 오르면서 잠시 몇 주 전을 회상했다. 남편과 이혼한 모네를 평생 곁에 둘 수 있게 되면서 모든 나날이 만족스러웠지만, 자고로 비일상이란 아주 갑자기 시작되고는 했다. 단란하게 살던 거주지를 먼저 정리한 남편이 식탁 위에 직접 깎은 나무 액자를 두고떠났다. 오랜 세월 동안 지갑에 계속 넣고 다녔던 모양인지 장식된 사진은 모퉁이가 둥글게 닳아있었다. 이십 대에 결혼한 시절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얄팍한 인화지가 더 이상 상하지 않도록 뒤판을 떼어냈다. 중간 지점을 붙들고 천천히 찢어내기 시작하자 모네의 옆자리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손바닥을 조금 넘어서는 상자를 가져왔다. 값비싸고 귀한 보석을 포장하는 마음으로 리본까지 묶어 그 사진을 보관했다.
얼마 가지 않아 직접 자가용을 운전하여 모네를 데리러 온 노아가 그 선물을 받아들었다.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늘씬한 팔을 어깨에 걸치고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며 고백했다. 시동을 끈 노아가 얇게 묶은 끈을 풀고 젊은 시절의 모네와 마주했다. 검정과 하양으로만 이루어져 안 그래도 수묵화 같던 미인이 흑백 사진에 담겨서 그 대비가 선명했다. 문득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절반으로 갈라내었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노아의 속내를 진작 읽어낸 모네가 턱선으로 부드러운 뺨을 붙여왔다.
“당신 결혼사진 옆에 놔줘요, 노아.”
앰브로즈의 가문을 이름에 달고 얼마나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는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지만, 인물보다 훨씬 커다랗게 인화되어 초상화처럼 거실이나 침실에 걸려있을 거라 예상했다. 도무지 비율이 맞지 않는 두 장의 흑백 사진을 떠올리고 노아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 투정이나 강요로 느껴질 리가 없었다. 단순하고 짧은 권유나 마찬가지였다. 고민도 하지 않고 모네의 등허리에 손을 올렸다. 네. 모모, 그러도록 할게요. 차라리 단둘이서 웨딩 촬영을 할까요……. 고요하고 애틋한 목소리가 입맞춤으로 서서히 사그라졌다.
영국은 물론이고 유럽에서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사진사가 정원에 열댓 명 정도 모여있었다. 다른 부부가 겪었다면 다소 긴장될 만한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까마득히 먼 과거로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듯했다. 호화스러울 정도로 여러 빛깔이 담긴 부케가 두 사람의 손에 들렸다. 지금 이 장면이 카메라에 담긴다면 분명 희거나 검게 덧씌워질 테다. 모네가 비스듬히 노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어떤 꽃이나 식물로도 표현되지 않을 녹색이었다. 초점이 떨어지고 정면을 바라보자 사진사 몇 명이 셔터를 내리눌렀다. 구름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던 검은 새 한 마리가 벚나무에 걸터앉았다. 마치 오랫동안 헤매던 요람으로 날아든 듯했다. 노아가 약속처럼, 모네가 예고도 없이 서로에게로 기울어졌다. 짙은 빛과 옅은 그림자가 선명하게 대비되어 무형으로 섞여들었다. 허공으로 쏟아지는 카메라 빛이 환성처럼 두 사람을 둘러쌌다. 순백처럼 눈이 부신 영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