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늦은 저녁, 분위기 좋은 술집 구석에 둘만 앉아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연인이거나 연인이 될 사이일 것이다. 중립을 표방하는 조계지는 수많은 이방인과 향락을 쫓는 사람들이 섞이기 좋은 환경이고, 그중에서도 미약한 가스등에 의존하여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술집이라면 어떤 말이 오갔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함구하는 이상 모든 일은 없었던 것이 된다.
“거짓말.”
“내가 왜 당신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닐까요, 형사님. 아, 이제는 형사 일 안 한다고 하셨나. 아무튼 간에요. 본인은 모르시겠지만, 귀하께서는 거짓말할 때 목을 뻣뻣하게 세우시거든요. 지금처럼.”
날이 선 말투와 달리 내뱉는 차분한 목소리의 기저에는 뻔뻔함과 자신감, 그리고 어딘가 뒤틀린 마음이 뒤섞여있었다. 서스럼없이 손을 뻗어 상대의 볼을 감싸 쥐는 손길도, 제 마음대로 볼을 짓누르며 애정 어린 손길을 퍼주는 마음도, 눈꼬리를 사붓하게 접어 웃는 얼굴마저도 과거에 알고 지낸-아는 정도가 아니지. 사실상 첫사랑인 듯했다.-이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명목상 ‘보호 감찰 대상’께서는 매일 저녁 찾아와 그 시간대는 본인 소유인 것마냥 면대면 대국을 이어 나갔다. 물론, 대다수의 이들은 이러한 행각을 두고 흔히 ‘데이트’라고 한다지만 멀쩡한 사내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장본인께서는 이 눈치 없는 사내가 무얼 알겠냐며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니 괜한 소리를 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했다.
“그래서, 생각은 해봤어요?”
“아직….”
눈썹을 까딱이는 모양새가 방금 그 답은 정답이 아니니, 다시 말해보라는 눈치였다. 사내는 황급하게 준비해 둔 2안을 꺼내려 했으나 입을 제대로 열기도 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막혀버렸더란다. 버번위스키 한 병, 그리고 건과일을 제외하면 안주랄 것 하나 없는 단출한 식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유리잔에 비친 등불도, 컵을 쥔 손의 온기에 녹아버린 얼음 조각도 아닌 저 눈이었다. 언뜻 보면 갈색인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바라보면 황금빛이 도는 것이 마치…. 아, 또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상념에서 벗어나는 걸 지켜보던 이의 표정은 무표정을 가장했으나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데요? 나 두고 다른 사람 생각한 게? 아니면, 내가 떠먹여 줘도 못 받아먹는 게? 그것도 아니면, 사흘 전 내게 아무 말도 없이 내 뒤를 쫓은 게? 말해봐요. 나 오늘 당신을 위해 쓸 시간이 몹시 많으니까. 어디 한 번 변명해 보라구요.”
“전부….”
“…아, 재미없어. 나 갈래요.”
상대가 문장의 마침표를 온전히 찍지도 못했건만, 벌떡 일어나 의자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 코트를 걸치고 나서는 발걸음은 거칠 게 없었다. 허나 언제 갑작스레 비가 내릴지 모르는 상하이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그의 계산에 없었던 길이었기에 기분 나쁘게 쏟아붓는 소낙비는 사내의 발걸음을 묶어버렸고, 이는 의도치 않게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제공하는 격이 되었다.
“이거 쓰고 가요.”
“됐어요. 당신이나 쓰고 가세요. 내가 비 쫄딱 맞고 감기에 걸리든, 열이 나서 누워있든 간에 알 게 뭐예요? 아니면, 그 좋은 실력으로 나만 감시하느라 말 안 해도 다 안다, 그런 뜻인가? 어느 쪽이든 불쾌하긴 매한가지이니 아는 척하지 말아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뒤를 쫓아 우산을 챙겨온 이 골칫덩어리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해결책을 제시하는 낯짝이 싫다. 심지어는 말 한마디에 곱절의 곱절로 답을 돌려줘도 속없이 우산을 내밀 뿐이다. 말조차 섞기 싫다는 완고한 태도로 앞만 보고 있자 그제야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중재를 요청하는 이의 행태조차도-너무 좋아서-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저한테 해명할 기회라도 주시죠, 도련님.”
“싫어요.”
“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넘어가 주고 싶어지니까. 그래서 듣기조차 싫어요. 만족해요?”
“하하….”
그러니 더더욱 들어야 할 텐데. 날숨처럼 내뱉는 말에는 급히 쫓아 나오느라 단번에 들이켠 위스키 향기가 짙게 배어있었다. 정확히 무슨 사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지만, 결코 이 관계가 수포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감시자와 보호자의 관계이든, 추후 함께 험난한 애정선의 난기류를 탈 사이가 되든 말이다. 타인이 풍기는 술 냄새는 맡기조차 싫다며 질색팔색하는 이였기에,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서 뜻 모를 무신론자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듯 손목을 꾹 잡은 손길은 이 거리의 차가운 온도와는 사뭇 다른 형질을 띄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둘 사이의 신경전을 식히기 위함인지, 화를 돋우기 위함인지 알 수 없는 빗방울은 점차 굵어져만 갔다.
“말도 안 하고 미행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당신에게 미리 이 사실을 알렸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날의 행적을 지웠을 테니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빈곤했다는 것만큼은 양해해 주면 좋겠는데. 어려울까요?”
“…이건 또 진심이시네.”
“그 똑똑한 머리로 나를 놀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뜻이기도 하죠.”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이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아뇨, 나는 충분히 알려줬어요. 못 알아차린 건 당신이지.”
쉬이 풀리지 않을 엉킨 실타래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눈을 가늘게 좁히고 진의를 파악하려 하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답답할 뿐.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는 이 도시에서, 정말 살 수 없는 것은 없을까? 따분한 소리를 하기 좋아하는 이는 사람의 마음이라 할 것이며, 자본주의에 찌든 사람은 그마저도 살 수 있으나 돈이 부족할 뿐이라며 잔소리를 할 것이고, 낭만에 젖은 사람은 누군가의 진심 어린 미소라 대답할 게 뻔하다. 모든 답의 공통점은 결국 ‘사람’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질문을 던진 장본인마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토독토독, 지면을 때리는 빗줄기는 그칠 기미가 안 보이고 옆에 있는 이는 제 해명을 듣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을 테니 둘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양보해야 했다. 그 양보의 대상은 애먼 사람에게서 과거를 투영시키는 본인이 될 터.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을 잊지 못하는 것은 단순 트라우마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 사람에게 본인만 기억하고 있는 고인을 겹쳐 보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문제였다. 다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형태의 집을 짓느라 요란법석을 떨 때에 지조 있게 구옥을 유지한 것이 화마火魔의 시샘을 샀던 것일까. 여즉 발화지점과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그 불은 밤낮없이 모든 것을 불살랐다. 손 쓸 틈도 없이 잃어버린 것 중에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생모는 죽어버리고, 금전적인 지원만 해주는 생부 밑에서 자라던 아이는 방계에서조차 의탁할 곳을 찾지 못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곳까지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적선 사업이라도 할 작정이냐며 아니꼬운 눈으로 보는 시선이 우세했으나-그도 그럴 것이, 세기가 바뀌고 변혁이 시작되는 마당에 외지인을 들인다는 건 미꾸라지일지 제비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이었으니 말이다.-예상보다도 더 작은 아이가 대문을 넘어 잘 부탁드린답시고 꾸벅 인사를 올렸을 때 입꼬리를 올리지 않은 어른이 없었으니, 그가 무사히 장성했더라면 적어도 류家의 금지옥엽으로 컸을 게 눈에 훤했다.
상투적인 말에 불과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야속하리만치 찾아오지 않는 이의 그늘에 묶여 새로운 사랑까지 놓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술기운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구는 사람 때문인지 유달리 어지럼증이 도진다. 아, 현기증인가. 반쯤 은퇴를 선언했음에도 꼿꼿한 자세만큼은 현역이라 자부할 만큼 번듯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갑자기 들이켠 술 한 잔에도 맥을 못 차린다. 어디에라도 앉아 있는 게 좋을 듯하여 공원 아무 벤치에나 자리를 잡으려는데 침묵 속 수수방관으로 일관하던 이가 팔을 붙잡는다.
“왜 그래요. 어지러워요?”
“어, 조금….”
“아, 이제야 효과가 돌기 시작했나 봐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내가 직접 해치워야 할 뻔했네.”
기가 막혀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기에는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앞뒤 정황이 뚜렷했으므로.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버티기에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우세했다. 팔을 붙잡고 있던 이는 잠자코 그 광경을 내려다보다, 이내 상대의 의식이 사라질 때가 되어서야 품에 한가득 안은 채로 기쁘게 웃었다.
➸
“일어나요, 형사님.”
“…….”
“이쯤이면 아무리 눈치가 죽어버린 당신이라도 알아차려야 할 텐데. 그 눈치로 형사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
등 뒤로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는 걸 보니 납치를 당한 것치고는 꽤나 호사를 누리는 중인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납치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으니, 짐짓 화가 난 척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어찌 해석한 것인지 재차 물어오는 질문의 투는 애교스럽기까지 했다.
“나 보고 싶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심증이 확신으로 변모하는 순간은 기쁨 혹은 슬픔 둘 중 하나라고 여겨왔는데, 이런 식으로 소름이 돋기는 처음이었다. 맥락을 따라잡기 어려운 대화임에도 그간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있음에서 느끼는 기쁨과 일언반구 하나 없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양가감정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저 맹랑한 녀석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진 못했으니 신중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매일 보면서도 모르는 것 같길래.”
“네가 말을 안 했으니까.”
“말을 해야만 알아요?”
“아마도. 나에 대해서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서야.”
을의 위치에 서 있는 발화자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뻔뻔한 답을 내뱉자 즉시 응징이라도 하듯 들고 있던 쇠붙이로-아마 총이겠지.-머리를 꾹 누른다.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단순 위협에 그친 듯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는 아예 침대 위로 올라와 자신의 협상 카드를 하나씩 꺼내 보였다. 총 한 자루, 그리고 연해주행 기차표 2장. 다소 극단적인 선택지이기는 하나 협상의 여지는 다분했다.
“됐고,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나랑 같이 해외로 망명하든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던가.”
“왜 그동안 나한테 말 안 했어?”
“말 돌리지 말아요, 그럴 시간 없으니까.”
“그럼, 내가 너를 따라가면 이유를 말해줄 의향은 있고?”
“네, 아마도.”
“따라가지 않는다 하면 죽여버릴 거고?”
“네, 확실히.”
나를 기억하는 유일한 목격자잖아요.
덧붙이는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솔직했다. 하기사, 위해를 가할 목적이었다면 납치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렸어야 했다. 손발까지 자유롭게 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했다. 한 번 정한 일에 있어서 결코 번복이라는 없는 아이가 당근과 채찍이 확실한 선택지를 준다는 것은 당근을 택하라는 무언의 종용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그래,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든지 간에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지 않던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표 한 장은 제 뒷주머니에, 나머지 한 장은 상대에게 돌려줌으로써 일시적인 유예 상태를 만들었다. 선택이 흡족한 모양인지 금방이라도 들이밀 것처럼 위협적인 기색을 뽐내던 권총은 장난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좋아요, 착하네.”
“그전에 확실하게 해 두자. 나한테 전부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볼과 입술 어드매 사이에 쪽, 하고 무언가 붙었다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뒷말을 따라 하는 태연자약한 태도에는 헛웃음이 찼다. 총이 진짜 총이었을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전까지는?”
“…….”
“왜요?”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어.”
나 또한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넘어가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궁금한 것은 무수하고 숨겨진 비밀은 미지수이다. 사람을 사랑으로 표백시키고자 하는 이와 사랑을 사람으로 표상하고자 하는 이는 이른 봄의 시냇물처럼 흐르기 시작한 비상식적인 연정의 현기玄機를 깨우칠 수 있을까? 답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