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단 한 순간의 섬광을 위하여 나아간다
늘어지던 그림자가 짧아지고 온종일 애끓게 울어대던 매미가 도시에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이례적인 폭염경보였다. 몇 시간마다 뉴스를 쏟아내는 라디오에서 서울 시민들에게 물을 많이 마시고 그늘을 찾아서 걸어 다니라고 안내했다. 정작 본인들은 소가죽으로 된 방송국 의자에 앉아있는 주제에 말이 많았다. 하여간 팔자 좋게 돈이나 버는 인간들은 역지사지가 안 된다고, 여름 곤충마저 무참히 죽어버리는 날씨에 시헌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놓았다. 옷깃을 들쳐서 목덜미에 고여있던 더위를 잠시 식혀냈다. 라이터를 애써 찾지 않아도 저절로 불씨가 발화할 듯했다. 전봇대 근처에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남들보다 워낙 열이 많은 체질은 골목길에 조금만 멈춰 있어도 양쪽 다리를 무겁게 했다. 총에 맞아서 거의 다 아물어 가는 왼쪽 옆구리가 바늘로 찌르듯 아픈 이유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턱 아래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바닥으로 직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씨발, 담배도 입맛이 있어야 피거나 말거나 하지. 겨우 돗대만 남은 담뱃갑을 신경질적으로 확 구겨버리려다 말았다. 시헌이 언뜻 인상을 쓰자 바로 눈앞에 있던 차에서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외제 차가 좋긴 좋은지 비좁은 틈으로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무딘 해일처럼 쏟아졌다. 언니, 언제 와? 그사이에 몸이 알맞게 얼었는지 기장도 맞지 않는 검은색 가죽 재킷을 꺼내 입은 예나가 물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도 모르는 차주의 취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한 모금도 빨아먹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듯 던진 시헌이 웃으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직 기다린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으면서 보고 싶었다면서 투정을 부리는 예나가 귀여웠다.
두 사람은 자그마치 이 년 전에 처음 만났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여 문득 아쉬워져도 별 상관은 없었다. 아마도 평일이었나, 어쩌면 주말일 수도 있었다. 서대문구에서 탈세로 유명한 판검사 부부가 사는 주택을 알뜰하게 털어내어 예나에게 금반지를 직접 끼워준 그 날부터 어림잡아 한 달을 더하면 그만이었다. 길 건너편마다 한 채씩 은행이 세워져 있거나 날고 기는 재벌가들이 즐비해 있는 동네에는 이미 시헌과 예나의 인적 사항이 담긴 지명 수배가 붙어있었다. 이미 다 들켜서 한적한 지방으로 떠나도 모자를 시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그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세 하나는 도무지 이길 사람들이 없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서울을 떠날 계획이 없었다. 곧 죽어도 압구정 한복판에서 죽고 말지, 입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안을 시간도 당장 부족했다. 이대로 숨어 지내봤자 지붕이 다 뜯어져서 변변찮게 물이 새는 폐가에나 들어가 살아야 할 꼴이 뻔했다. 그런 걱정을 할 때마다 시헌이 꺼내는 말은 언제나 일관되다 못해 똑같았다. 걱정하지 마, 예나야. 언니가 어떻게든 해줄게. 이 문장의 시작을 따지고 들자면 두 사람이 동시에 기억하는 이 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신촌 한복판에 세워진 지하 다방은 사실 간판만 없을 뿐이지 대학교 교양 수업 건물이라 불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푼돈을 받고 일하는 공장 인부들이 아닌 대학생들을 손님으로 삼으려면 그럴싸한 사업 수단이 필요했고, 다방 주인은 도대체가 단순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 문제를 월간지 하나로 해결되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원색으로 칠해진 다른 책들과 다르게 그 얇은 잡지는 빛깔이 엷고 밝으면서 제목은 불란서어로 쓰여있었다. 돈이 필요한 나머지 무작정 다방에서 일하기 시작한 예나에게 그 잡지는 단순한 인테리어 용품에 불과했지만, 세련된 청바지를 입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대학생들에게는 새롭게 향유하기 좋은 물건이었다. 다방 주인은 근처 대학이 끝나서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할 오후 시간대에 예나를 종업원으로 세워두었다.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마주해야 잘 먹힌다는 이유도 있었고 가장 중요한 지점은 예나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나아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그래서 부려 먹기 쉬운 여자아이. 푼돈밖에 되지 않는 손님을 받기 싫다고 말했던 다방 주인은 예나에게 항상 월급으로 변변찮은 액수를 지급했다.
창틀에 쌓인 먼지를 지루하게 닦아내던 이른 아침이었다. 반쯤 불투명하게 시트지를 붙여놓은 유리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다방을 열어놓은 지 아직 삼십 분도 채 되지 않다 보니 단순히 일찍 일어난 대학생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면 진부한 내용으로 글을 쓰러 온 문인이거나. 주름진 치마에 물기를 닦고 있던 예나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은 여자 쪽으로 걸어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높게 묶고 그 아래로 드러난 옷차림은 죄다 비싸 보였다. TV에서 정치인이나 탤런트들만 걸치고 신는다는 셔츠, 바지, 신발……. 브랜드 종류를 모르는 예나여도 그게 전부 명품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커피 한 잔만 줘.”
품에서 꺼낸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가 흘러나왔다. 잔돈은 필요 없다고 말한 여자가 한 시간만 대화 상대를 해달라며 예나에게 손짓했다. 변명 좋게 ‘서양식’을 본보기로 내세우느라 다른 다방보다 반 뼘은 더 작은 머그잔에 커피를 내온 예나가 순순히 맞은편에 앉았다. 여자는 담배를 피우며 자신을 안시헌이라고 소개했다. 일찍 일어난 대학생 같은 얼굴로 진부한 내용으로 글을 쓰러 온 문인처럼 듣기 좋은 단어만 꺼냈다.
“아침마다 지겹지 않아?”
어느 대학에 다니고 지금까지 어떤 남자와 연애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던 다른 손님들과 다르게 시헌은 분명히 웃고 있었다. 좁다란 구조로 되어있는 작은 공간에 커피 향이 물씬 퍼졌다. 잔을 매만지는 손가락 근처로 보이는 손등뼈 위에 단단한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예나는 본능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시헌은 예나가 어떤 갈증을 품고 있는지 전부 다 알고 있는 듯이 굴었다.
어제와 똑같이 출근해서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유니폼을 입고, 가끔 질 나쁜 대학생들이 너를 깔보거나 자기들만 아는 농담이나 지껄이고…… 내가 너라면 그 모습이 멍청하게 보였을 거야. 저런 것들한테 우리나라를 맡겨도 되나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이어지는 모든 목소리는 마땅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필터를 깨물고 호흡을 작게 빨아들이자 불씨가 점차 타들어 갔다. 작은 변덕인 줄로만 알았던 시헌의 관심은 몇 분짜리 레토르트 식품처럼 단순하게 소모되지 않았다. 작은 손짓에도 높낮이가 다른 테이블이 흔들려 커피가 요동쳤다. 그 위로 홀린 듯이 시헌을 바라보고 있는 예나의 얼굴이 비쳤다. 유감스러울 만큼 단조롭게 살아가는 자신을 가장 밑바닥으로 이끌어줄 구원자를 만난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하면 여길 벗어나나 생각했겠지.”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몇 개월째 다방에서 착실하게 일하고 있는 어린 여자에게 얻고 싶은 종류가 도대체 무엇인지. 시커멓게 물든 담뱃재가 커피잔으로 추락했다.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시헌의 손등을 잠자코 쳐다보던 예나가 몇 가지 가설을 세우다 말았다. 이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어? 가장 처음으로 듣고 싶었던 사유였다. 시헌이 입술에 걸치고 있던 담배를 예나에게 망설이지 않고 물려 주었다. 난데없이 불안해졌다. 동시에 위안이 되었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나의 곁으로 가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오늘 아침에 너를 처음 봤어. 그리고 있잖아, 이제 그건 더이상 중요하지 않아. 어서 나가자. 허리에 묶여있던 앞치마가 손끝 하나에 풀리며 중심이 저절로 기울어졌다. 각자 혼자서 들어왔던 유리문을 이번에는 둘이 함께 나섰다.
한 차례 돌이켜보면 그날은 지금보다 훨씬 서늘한 여름 날씨였다. 시헌이 예나를 데리고 나와서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고급 승용차에 이 여자아이를 밀어 넣는 거였다. 다행히 두 사람이 서 있는 장소는 신촌 한복판이었고 부모를 잘 만나서 자차를 끌고 다니는 이십 대 초반 대학생들이 드물게 보였다. 시헌은 주위를 가볍게 훑어보다 말았다. 건너편 유료 주차장에 세워진 독일제 차량을 발견하고서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 어떠한 거리낌도 가지지 않은 채 주먹을 들어 유리창을 순식간에 무참히 깨 버렸다. 열쇠를 두 개나 가지고 다니는지 문이 번듯하게 잠겨있어도 운전석에는 차 키가 꽂혀 있었다. 아무래도 사주를 잘 타고난 부잣집 아가씨나 도련님이 타고 다니던 물건이었나 보다. 예나가 시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거 언니 차 아니잖아.”
“왜? 이미 내 손을 탔는데.”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 거지. 사치 따위 모르는 말투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예나는 햇빛에 비쳐서 반드럽게 흔들리는 시헌의 머리카락을 쳐다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헌에게 손가락질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기대에 부푼 일곱 살짜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시헌이 운전석으로 들어가 잠금을 풀었다. 얼마 가지 않아 예나가 그 옆자리에 올라탔다. 가장 귀한 보화를 선물로 한가득 받아버린 듯했다. 사이드를 풀어서 기어 넣는 소리가 들리자 예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아하하 웃었다.
시내 중심을 떠돌아다니다가 기름이 다 떨어지거나 더 쓸만한 자가용을 발견하면 가책 없이 운전석을 반쯤 부숴버렸다. 반년 정도가 흘러간 연말이었다. 아직 두 사람의 거처가 정해지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 어떤 가책도 지니지 않는 시헌이 차를 여러 번 바꿔 타면서 예나의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조금 더 길러보는 편이 어떻겠냐고 했다. 예나는 글로브 박스를 열어서 크기에 맞지 않는 가죽 장갑을 끼고 이리저리 손등을 돌려보았다. 응. 그렇게 할게. 언니는 머리가 길어서 예쁘다. 주방 가위로 엉성하게 잘라낸 시헌의 옆머리는 누가 살펴보나 길이가 서로 맞지 않았지만, 예나가 그렇게 애교 부리고 있자니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 안 그래도 너무 길어서 불편했는데 앞으로 네가 묶어주면 되겠다. 시헌이 바라는 바는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아침마다 한쪽 머리를 땋아주는 거.
한적한 공원에 주차해놓고 잠을 자면 그게 밤이었고 한나절이 지나서 눈을 뜨면 그게 아침이었다. 예나는 한 번도 그 약속을 어긋나게 하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워 혼곤한 상태에서도 다 늘어난 고무줄로 시헌의 머리를 땋아주었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근처에 있던 마트에서 시헌이 돈을 가져오던가 물건을 훔쳐 왔다. 무슨 수를 썼는지 물어보면 항상 대답을 대신하여 바지춤에 숨겨두었던 칼을 보여주었다. 가장 단순하고 간편한 방법이라고 했다. 진짜로 누군가를 찔러 상처 내진 않겠지만,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어도 전부 쉬워진다고 그랬다.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시헌에게 있어서 그 말은 같이 있고 싶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그 이후로 시헌은 예나를 향하여 기다려 라는 말보다 같이 가자는 말을 더 많이 꺼냈다. 이리 와. 너 없이 내가 어딜 가겠어. 잘 따라와야 해. 기다란 손가락이 둥근 뺨을 스치면 예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뒷골목에서 쓰레기나 주워 먹게 하지 않을 거라고. 돌아갈 집이나 안아줄 가족이 없는 예나에게 시헌은 목줄 끄는 주인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가 되어주려고 했다. 누군가 오만에서 비롯된 열정이라 비웃어대도 상관없었다. 장미 꽃다발을 한가득 사 온다거나 녹음 기능이 있는 동물 인형에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사이라면 그렇게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구애가 아니라 순전히 시헌은 자기 방식대로 예나를 달래주고 싶었다. 여름철 폭우처럼 한순간에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신 죄의식에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렸나 보다. 예나는 그 과정에서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시헌이 앞날에 대하여 꺼내는 결심 사이에서 예나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어떻게든 해준다는 거였다. 걱정하지 마, 예나야. 언니가 어떻게든 해줄게. 항상 그 소리를 들으면 내일을 당장 기대하기보다 마치 내일이 없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경사진 비포장도로에 진입하자 자동차 바퀴가 금세 퍼졌다. 누군가 바닥에 던져버린 대못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액셀을 밟아도 도무지 나아가지를 못했다. 이 비좁은 서울에 아직도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길목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 실어놓은 샌드위치나 딸기 우유를 눈에 보이는 대로 먹어 치웠다. 운전석에서 내린 시헌이 반대편으로 가서 예나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느덧 여름이었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빛을 피할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다 보니 경찰을 마주할 걱정은 줄어도, 다르게 말해보자면 그만큼 새로 훔쳐 탈 이동 수단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한적했다.
숨통이 조이도록 쏟아지는 열대야 아래에서 먼저 지쳐버린 사람은 시헌이었다. 피부끼리 짓눌리는 팔꿈치 사이로 땀이 고였다. 머리를 몇 번이나 높게 올려 묶어도 불쾌 지수가 정수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른 팔로 시헌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예나가 값비싼 옷감 아래로 느껴지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소년원에서 유리 조각에 찔렸다고 시헌이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엉망으로 흉터가 짓물러진 상태였다. 예나는 처음 만났을 적에 보였던 침울한 표정과 다르게 천진한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우리 저기로 가자. 나 참, 언니는 정말 여름에 약하다니까. 늦여름에 만나서 다시 한여름이 찾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제법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허리춤에 올라와 있던 예나의 손을 시헌이 포개어 잡았다. 입술 사이를 가로막는 무더위가 통증처럼 예민하게 번져서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함부로 변모한 목적지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늦은 저녁 시간에도 노을이 채 저물지 않아 드물게 불이 켜진 상권이 보였다. 예나가 비어있는 손으로 왼쪽 길을 가리켰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보석상이 시선에 들어왔다. 이 정도 상권에 저런 이 층짜리 건물이라면 분명 에어컨이 켜져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시헌이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의견에 수긍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바지춤을 더듬자 절연 테이프로 칭칭 감아낸 칼 손잡이가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꼬박 하루 동안 표지판도 세워지지 않은 길가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탓에 잃어버리지 않은 게 용했다. 높은 체온을 머금은 칼날이 시헌의 손길에 의하여 뽑히거나 닫히기를 반복했다.
“갖고 있던 돈도 거의 다 떨어지지 않았어?”
“한동안 짭새 피해서 몸만 사렸으니까.”
그래도 보석상에서 금품을 사들일 건 아니었다. 굽이진 골목길만 가려내어 끈질기게 걷던 두 사람의 눈으로 가게 불을 끄는 주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시헌이 예나에게 조심하라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진짜로 몸을 사려야 할 사람이 누군데. 예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을 듣다가 시헌의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에어컨 한 대에 선풍기 두 대가 거리낌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불경기에도 장사가 꽤 잘 되는 모양이었다. 오늘 영업은 진작 끝났다고 불평하던 주인이 두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고 금방 겁에 질렸다.
우습게도 먼저 상대에게 달려든 사람은 시헌도 예나도, 보석상 주인도 아니었다. 이 층에서 청소를 다 끝냈다던 젊은 청년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다. 경찰서 전화번호는 왜 이렇게 간단한 건지, 그사이에 신식으로 된 버튼을 다 누른 청년이 우선순위를 새로 정리하였다. 조잡한 가짜 프리지아가 꽂힌 화병을 왼손으로 뒤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헌이 등 뒤로 예나를 숨기고 칼을 꺼내어 정면을 향해 겨눴다. 이어지는 중년 남성의 비명과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경찰관의 외침이 귓가 근처를 날카롭게 스쳤다. 잘 닦인 바닥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시헌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그러게, 누가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려들래? 칼침을 놓은 시헌이 예전처럼 주먹으로 유리로 된 진열대를 깨부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목걸이와 귀걸이를 움켜쥐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청년을 보석상 주인이 살피며 동시에 두 사람을 허탈하게 응시했다.
“당장 병원에 연락해.”
그 새끼가 죽으면 내가 사람 해친 살인범이 되잖아. 그게 시헌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예나가 쉽게 뒤따라올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추고 팔짱을 꼈다.
한참 대로변을 달려서 아무렇게나 잠시 세워둔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사이에 보는 눈이 올랐는지 기가 막힐 정도로 비싼 영국제 모델이었다. 양손 가득히 챙긴 보석을 무릎 위로 와르르 쏟아냈다. 악착같이 옆에서 시헌을 쫓은 예나가 드디어 참았던 숨을 뱉었다. 묶어두었던 머리카락이 느슨해진 시헌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를 먼저 죽이려고 했어. 왜 그랬던 거지.”
전혀 해칠 생각이 없었는데. 에어컨 바람이나 조금 쐬고 가려고 했는데 꽃병을 들고 덤빌 줄 몰랐다며 시헌이 탄식했다. 동시에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다만 이 보석들을 팔면 어느 정도 돈이 되겠다고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변명으로 예나에게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예나는 그 대신 시계 방향으로 열쇠를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언니, 빨리 가자. 어떻게든 해준다며. 그러려면 어디로든 가야 하지 않겠어? 손가락 사이에서 가장 얇은 금줄을 놓쳐 떨어뜨린 시헌이 그 말을 다 듣고 운전대를 붙잡았다. 후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속도를 올려 나아갔다. 그러다 예나와 눈이 마주치면 지금껏 벌어진 온갖 사건 사고를 전부 다 잊어버렸다는 얼굴로 얼른 도망가자고 말했다. 다른 보석상에서 이것들을 죄다 팔아버리자고, 가장 예쁜 보석만 서너 개쯤으로 네가 직접 골라내어 달라고 덧붙였다.
내일이 되면 이제 두 사람의 얼굴은 곳곳에 내달아질 거였다. 안시헌과 금에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 테고, 너 나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다음 목적지를 알고 싶어서 모두 안달이 날 예정이었다. 우리는 이 고단한 세상에서 가장 너절한 자극으로 남겨지겠지. 시헌이 빨간불을 무단으로 지나쳤다. 순찰차로 보이는 각진 승용차가 금방 뒤따라왔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새롭게 동이 트면 어차피 두 사람은 여기에 없을 테니까. 가드레일 없는 낯선 도로가 두 사람을 새로 반겨주었다. 두 사람에게 더이상 내일은 없어 늘 그렇듯 앞만 보고 달렸다. 당장 죽을지언정 끝까지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