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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헌터우드      에드먼드 헌터우드(허이문 扮). 저명한 음성학자로, 『헌터우드의 바르게 말하기』를 저술했다. 권세 있는 가문에서 부유하게 자랐으나 사교성은 그리 좋지 못하다. 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잭을 신사로 만든다.

      잭 굿맨(조인호 扮). 채링 크로스 역 부근에서 신문을 팔던 청년으로, 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헌터우드의 가르침으로 신사가 되려 한다. 품위와 매너, 언어 습관을 익힌 다음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자신의 살롱을 여는 것.

 

 

 

 

 

제1막

 

 

 

  밤 11시 15분의 런던. 채링 크로스 역을 지나는 마지막 지하철이 정차한다. 언더그라운드 특유의 쿰쿰한 냄새.

  말쑥한 정장 차림의 우울해 보이는 남자가 막 발을 승강장에 내딛는 순간, 모자를 깊이 눌러쓴 꼬마가 남자를 치고 지나간다. 남자는 몇 발 밀려난 직후 자신이 방금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      (승강장에 엉거주춤 선 채 코트 주머니를 뒤진다.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약간 굽은 목을 빼어 들고 언뜻 봤던             모자를 찾지만, 정확히 기억해 내진 못한다) 빌어먹을…….

 

 이때 사람 좋아 보이는 청년이 한 손에는 가죽 지갑과 신문 뭉치를, 한 손에는 꼬마의 덜미를 붙잡은 채 남자에게 다가온다.

 

청년      (억양이 심한 타지 사투리, 예의 바르게) 안녕하십니꺼, 선상님. 뭐 이자뿐 거 있으시지예? 저짝서부터 보이께네                 날치기 당하신 것 같아가예. (꼬마를 앞에 세우고) 아야, 퍼뜩 잘못했다캐라.

꼬마      (버둥거리다 말고 런던 사투리로) 이거 놔유! (뿌리치고 도망간다)

청년      (빈손 보며 멋쩍게 웃고) 아이, 점마 진짜 까칠하네. 지도 몬살아가 저런다 아입니꺼. 선상님이 쫌 봐주이소. (지갑              을 남자에게 건넨다. 그는 허름한 셔츠와 멜빵 바지를 입었다. 착용한 갈색 팔각모는 낡았고 나이대와 어울리지 않              는다. 기다란 팔다리와 커다란 키는 좋은 유전자를 받았음을 짐작게 하지만,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 멀대같다. 웃                는 낯인 그의 용모는 정장을 빼입은 남자의 것보다 못하지 않지만 개선해야 할 게 많다. 그리고 이쯤에서, 미안하                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사투리를 발음 기호도 없이 재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기로 한다)

남자      (불손한 눈빛으로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지갑을 받아 내용물을 확인한다. 지갑 안에는 지폐와는 다른, 낡은                 종이 몇 장이 들었다. 종이에는 발음 기호와 몇 가지 단어 및 지역 이름이 적혀 있다) 버밍엄에서 여기까지 왔나 보              군. 꽤 먼 길을 와서 일하는 듯한데,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심한가?

청년     (웃음소리) 도와줄 수 있는데 일부러 돕지 않을 만큼 나쁜 성격은 아니죠! (놀란 표정) 그런데 제가 거기서 온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저를 아세요?

남자     내가 널 어떻게 알아? (지갑에 넣으려던 종이를 도로 꺼내 그 위에 뭔가 적는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다. 필기를 보여            주며) 네가 이걸 읽을 수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자, 읽어 봐.

청년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이걸 어떻게 읽어요? 영어가 아니잖아요!

남자     난 읽을 수 있어. 영어 맞아. (천천히 기호를 읽는다. 청년이 구사하는 사투리와 몹시 흡사한 발음이다) 〈안녕하십               니꺼, 선상님. 뭐 이자뿐 거 있으시지예? 저짝서부터 보이께네 날치기 당하신 것 같아가예.〉

청년      우와! (박수)

남자      허……. (잠시 침묵하다가) 아무튼 볼일 다 봤으면 꺼져.

청년      (당황한 음성) 네? 제가 도와드렸는데 사례도 안 하고 그냥 꺼지라고요? 뭐, 보상을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보              통은 고맙다고 하지 않아요?

남자      (어깨를 으쓱인다) 뭐, 그래. 감사.

청년      (활짝 웃고) 별말씀을요! 그래도 정 감사하시면 그 영어 같지 않은 영어 어떻게 읽은 건지 알려 주세요! (옆에 서서              남자를 툭 밀친다. 힘없이 서 있던 남자는 얼결에 밀려난다) 저는 잭 굿맨이라고 해요. 아까 그 아이는 제 사촌 누                님의 남편 쪽 조카쯤 되는 녀석이고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런던 처음이시면 가시는 길 안내해 드릴까요?                어디 가세요? 마차 불러 드릴까요?

남자      (짜증스럽게)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야, 나 돈 없어. 그냥 좋게 말할 때 꺼지라고. 감사 인사도 해 줬잖아.

잭         그럼 신문 한 부 사실래요?

남자      돈 없다니까?

잭         저는 지금 신문 팔 시간도 놓치고 소매치기범을 잡아 드렸는데 진짜 이러실 거예요? 조금만 좀 도와줘요. 선생님께              선 교통비 조금 버린다 해도 들어가실 집이 있지만 저는 오늘 집세 내는 날이란 말이에요. 그로버 아주머니가 저희             빌라 집주인이신데요, 진짜 장난 아니게 무서워요.

남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보상 바라고 한 거 아니라며?

잭         그거야 그냥 해 본 소리죠. 물론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진짜 보상이 돌아오면 기쁘니까요! 그 이상한 글자 적힌               종이요, 중요한 거 아닌가요? 사촌 누님의 남편의 조카가 또 훔치면 어떡해요? 아, 제가 가는 길까지 편안하게 에                스코트해 드리면 선생님께서도 편하고, 저도 합법적으로 사례금 받아서 집세 낼 수 있고. 둘 다에게 윈윈인데?

남자      (피곤한 듯 한숨 내쉬고) 쌍으로 사기꾼이었군.

잭         사기라니 말이 좀 심하시네. 진짜 선한 의도로 드리는 제안이에요, 선생님. 저 진짜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역             불 다 끌 때까지 이렇게 붙어 있어요?

 

 남자는 기가 다 빨린 듯 고개를 떨군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잭에게 내민다. 명함에는 ‘에드먼드 헌터우드’라는 이름과 그의 연구실 주소가 적혀 있다. 잭이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 걸 본 남자는 그를 세게 밀어 떨어뜨려 놓는다.

 

헌터우드 (지친 목소리) 거기 적힌 주소로 안내해. 푼돈이라도 쥐여 줄 테니까…….

잭          어, 정말요? 진짜 주세요?

헌터우드 받기 싫어?

잭          (기쁜 음성) 아뇨! 아뇨, 아뇨. 지금 바로 마차 잡아 올게요! 정문 쪽으로 나오세요, 선생님!

 

 폴짝폴짝 날듯이 뛰며 잭 퇴장.

 헌터우드, 그런 잭의 뒤태를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뒤이어 퇴장.

 

 

 

 

 

─ 막 ─

제2막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의 메이페어, 헌터우드의 연구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린다. 헌터우드가 마부에게 삯을 지불하는 동안 잭은 그리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저택의 대문을 살펴본다. 문 안쪽에 작은 정원과 벤치, 그리고 본관이 있다.

 

잭           와아, 진짜 크다. 저도 이런 집에서 한 번쯤 묵어 보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살고 싶은 건 아니고요. (꾸며 낸 어조)               모름지기 집이란 너무 커서도, 또 너무 작아서도 안 되는 법이죠.

헌터우드  쓸데없는 소리 말고 떨어져.

 

 두 사람이 본관으로 들어간다. 틀에 박힌 듯 단정하던 외부와는 달리, 실내는 조금 더 화려하다. 하지만 두 공간 모두 강박적인 형식미를 공유한다. 내부는 단출한 책상과 고풍스러운 책장, 비싸 보이는 소파와 티 테이블 따위가 놓여 있다. 잭이 푹신한 소파를 신기해하며 눌러 보는 동안, 헌터우드는 모자만 벗어 모자걸이에 건다. 그리고 의자 옆에 선 채로 책상에 놓인 노트에 뭔가를 필기한다.

 

잭           (소파에 앉는다. 폭신한 촉감에 만족스러운 표정) 이거 진짜 좋은데요! 침대는 이것보다 더 부드러운가요?

헌터우드  (잭을 못마땅한 낯으로 노려보다가 고개 돌린다. 책상 위 북엔드를 뒤져 한 권 꺼내면서) 없어, 침대. 그리고 그                  소파,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소파야. 망가뜨리지 말고 문가에나 서 있으라고…….

잭           (듣는 둥 마는 둥) 저도 솜과 짚을 반씩 넣은 매트리스를 최근에 샀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사기당한 것 같아요. 안                에 곡식은 안 넣었다고 하던데, 어디선가 자꾸 쥐 소리가 들려서요. 괜히 찾았다가 이불 밑에서 발견할까 봐 겁이               나서 찾을 용기는 안 들지만요……! 그래도 짚보다는 솜이 좋긴 하더라고요.

헌터우드  안 궁금해. (잭의 말을 자르며 서랍을 연다. 서랍 안에는 면으로 된 주머니가 들어 있다. 주머니에서 꺼낸 크라운                 하나를 잭에게 던지고) 남의 집에서 주인 행세 그만하고, 이거 받고 떨어져.

잭           (날아온 동전을 요령 좋게 받는다. 생소한 듯 크라운을 이모저모 살피며) 근데 저 방세 이걸로 안 내는데요?

헌터우드 뭐?

잭           2실링만 내면 돼서요. 사실 이런 동전 볼 일도 별로 많지 않은데, 오늘은 제가 운이 좋은가 봐요! (아쉬운 듯 한숨,               동전을 헌터우드에게 돌려준다) 거슬러 주시면 안 될까요? 받는 주제에 이런 것까지 따져서 죄송하지만 이대로                   가져가면 저 돈 그대로 다 뜯겨요!

헌터우드  (갑자기 손을 잡혀 동전을 돌려받아 당황한 기색, 뻣뻣하게 손을 빼내며) 양심이 없네.

잭          (미소) 네, 그래서 좀 죄송해요. 그래도 기왕 주시는 거 알뜰하게 쓰이는 게 좋잖아요~ 집은 언제 이사 갈지 모르                 는건데.

헌터우드 (실링 2개와 6펜스 1개를 잭의 손바닥에 떨어뜨린다) 남는 돈은 뭐, 알아서 처리하고. 이제 나가.

잭          감사합니다~ (동전을 챙기며) 벌써요? 저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조금만 더 구경하고 가면 안 될까요? 저                  사실 이렇게 넓고 좋은 집은 처음 봤어요. 고급 살롱을 지나가면서 들여다본 게 다거든요. (티 테이블 쪽으로 가                  가구를 손으로 훑는다) 여기서 생활하면 어떤 기분인지 여쭤봐도 돼요?

헌터우드 끈질기네……. (못마땅한 숨소리, 괘종시계 근처 벽에 몸을 기대고) 몰라. 여기서 생활 안 하니까. 여긴 그냥 연구               실이고, 집은 옥스퍼드셔에 있어.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키며) 그래서 침대도 없지.

잭          오오. 그럼 여기도 어떻게 보면 살롱 같은 곳이네요? 헌터우드 씨가, 그러니까, 만약 가게를 운영하신다면요. 연구               실이 아무튼 일하는 곳이라는 말이죠?

헌터우드 (헌터우드는 귀하게 자라 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잭의 순진한 질문에 대답하기 전 그는 잠시 고민한다. 그              시간은 길지 않다) 어.

잭          좋겠다~ 저도 돈을 많이 모으면 언젠가 제 이름으로 가게를 열고 싶어요. 옷도 팔고, 머리도 손질해 주고, 화장용               품도 추천해 주는 그런 살롱이요. 손재주가 괜찮은 편이라서요, 가끔 방세를 못 내면 머리를 만져 주고 대신 넘어               가기도 했어요. (꿈꾸는 듯한 음성) 테마는 점잖은 톤의 우드로 할래요. 창문은 크게 뚫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              들어오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역 근처에 자리 잡고 싶어요. 그러려면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                 지만, 꿈이 커야 깨진 조각도 큰 법이죠!

헌터우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도 분주히 받아 적는다. 성의 없이) 미용을 배웠나? 신문 팔고 사는 줄 알았더니.

잭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오가면서 어깨 너머로 조금 익혔어요. 가게를 차리기 전에 정말로, 정식으로 미용 기술을 배               우고 싶긴 한데…….

헌터우드 어, 잠깐.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 (잭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며) 다시.

잭          네? 정식으로 미용 기술을 배우고 싶긴 한데, 그거요?

헌터우드 음. 좋아. (마저 받아 적는다)

잭          (헌터우드에게 다가가며) 그런데 뭘 그렇게 적는 거예요? (노트를 훔쳐보고) 진짜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                      네……. 아까 그 이상한 문자죠, 이거?

헌터우드  발음 기호라고 하는 거다, 이 무지렁아. (기고만장해서) 방금 네가 했던 말을 적어 뒀지. 아주 중요한 연구 사료라                서. 심지어 생생해! 언어는 듣는 즉시 기록하는 게 제일이야. 유통 기한이 있으니까……. (흐려지는 말꼬리, 돌연                 잭을 보고) 방언을 연구하는 중이거든. 그나저나 네가 살롱을 차리겠다고? 그 말투로? 어림도 없지. 꿈 깨셔.

잭           너무 부정적인 것도 안 좋거든요? (헌터우드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제 말투가                   어때서요? 그래도 이제 많이 런던 사람 같아졌는데.

헌터우드  (단호하게) 재수 없어. 브러미가 다 그렇지, 뭐. 단어 하나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점원을 너 같으면 쓰고 싶겠                   어? 여기 사는 다른 사람들이 너한테 어떻게 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그 발음은 분명 마이너스 요소야. 보아                   하니 고급 살롱에서 일하고 싶은가 본데……. 고향을 끊어 내는 게 좋아.

잭          (시무룩해져서) 그래서 다들 제 신문을 잘 안 사 준 걸까요? 말투 때문에……. 사실 저요, 사람 사귀는 건 진짜 자신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런던에 와서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 사귀는 게 좀 어렵다고 느껴졌거든요. 그냥 수도 사                 람들이 깍쟁이인가 싶었는데 문제가 저한테 있었던 거라면 기분이, 음, 조금…… 그러네요.

헌터우드 (시가를 하나 꺼내 입에 문다. 불은 피우지 않고 잭을 위아래로 살핀다) 영 못 들어 줄 정도는 아닌데…….

잭          위로예요?

헌터우드 아니. (흡연하는 시늉, 손을 내밀고) 2실링만 줘. 내가 널 그럭저럭 괜찮게 만들어 주지.

잭          네? 저, 그런데 저 이거 제 방세…… 내라고 주신 거 아니에요?

헌터우드 그건 알아서 해결해. 난 지금 너한테 아주 귀한 기회를 제공하는 거라고, 멍청아. 내 수업이 고작 2실링짜리인 줄                알아? (시가를 연신 잘근거리며) 발음과 행동거지, 그리고 누추한 꼬라지만 조금 바꾸면 돼. 그러면 네 소원대로                 살롱 일도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 오너가 될 수도 있어.

잭          혼란스러워하며) 너무 저한테만 좋은 조건 같은데요?

헌터우드 대신 주기적으로 와서 내 연구를 도와. 너 친구 많지? (잭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다.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걔네                도 가끔 데려오고. 내가 뭘 시키든 토 달지 말고 해. 그러겠다고 약속하면, 또 그걸 잘해 내면 추천장을 써 줄 수도               있으니까.

잭           어, 추천, 지, 진짜요? 추천장이 있어야 살롱에 들어갈 수 있어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이밀고) 말 잘 들어요!                 저 친구도 많고요, 어, 당장 내일 데려올 수도 있어요! 할게요! 아, 이게 아니라. (헌터우드에게서 받은 돈 전액 도                로 반납하며) 수업 꼭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헌터우드  (떨떠름한 표정) 어……. 그래. 친구는 아직 필요 없고, 내일부터 매일 여기에 와. 아니, 그냥 여기서 숙식해                         도……. (고개를 돌리며) 저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방 몇 개 나와. 복도 끝에 있는 오른쪽 방에서 자.

잭          네! 네! 감사합니다. 진짜, 정말 감사해요! 저 열심히 할게요!

 

 잭은 그 이후로 몇 번 더 헌터우드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신이 난 채 계단으로 뛰어간다. 퇴장.

 헌터우드, 그 모습을 보며 방을 내어 주기로 한 선택을 후회하듯 홀로 중얼거린다. 본관을 나가며 퇴장.

 

 

─ 막 ─​​​​

제3막

 

 그로부터 약 반년 더 넘게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잭은 거의 매일 연구실에 방문해 발음을 교정했다. 연구실에 있는 소리굽쇠와 축음기, 파이프 등은 잭의 장난감이 되었고, 진열장 안에 박제되어 있던 의료 교육용 인간 두개골 단면상은 그의 또 다른 친구가 되었다. 물론, 잭의 진짜 친구들도 곧잘 연구실을 방문했다. 헌터우드는 그들을 홀대하진 않았으나 피곤해했다.

 곧 그들은 수확할 때를 맞이한다. 이른 저녁, 반짝거리고 화려한 크루즈. 해가 수면 밑으로 막 떨어지는 순간을 틈타 잭과 헌터우드가 선내 클럽에 입성한다. 사용인 한 명이 두 사람을 곁눈질로 살핀 뒤 물 흐르듯 입장을 허가해 준다.

 헌터우드는 빳빳한 정장과 더블브레스트로 된 프록코트를 입었다. 광 없는 구두는 부드러운 가죽 재질이다. 신사답게 단추를 모두 잠갔고, 약간 굽은 고개 위에는 탑햇이 얹혀 있다. 반면 잭은 헌터우드와 모든 것이 반대된다. 그의 구두는 먼지도 미끄러질 만큼 광이 나고,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으나 발에는 딱 맞는다. 같은 검은색임에도 잭이 입은 테일 코트가 좀 더 하늘거리고 맵시 있다. 적당히 차려입은 느낌을 주는 헌터우드보다 잭이 더 활동적이고 잘 꾸민 듯한 느낌을 준다. 그가 쓴 볼러는 큰 키와 작은 얼굴을 잘 강조한다.

 두 사람은 여러 명이 모여 있는 테이블로 가 앉는다. 개중 헌터우드의 지인도 있다. 잭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제 만났던 것처럼 인사하고, 헌터우드는 지인에게조차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그의 지인은 익숙한 듯 헌터우드를 향해 모자를 벗어 보인다.

지인       (헌터우드에게) 자네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헌터우드 오랜만이야, 해리슨. 자네 있는 줄 알면 안 왔어.

해리슨    (호쾌하게) 변함없이 괴팍하군! (잭을 보며) 모처럼 새 사람을 데려와서 나는 자네가 사고로 기억을 잃었나 했지.                신사분을 우리에게도 소개해 주지 않겠나?

헌터우드 음, 이쪽은……. (잭을 보며 잠시 침묵) 잭 굿맨이라고 하네. (테이블 밑으로 잭을 건드린다)

잭          아. (깨달은 듯 해리슨에게 손을 내밀며) 만나서 반갑습니다! 잭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전의 방언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 실은 제가 배를 무서워합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도 그러셨죠. 내륙에서 살다 보니              물가는 항상 미지의 세계였어요. 하지만 선상 파티에서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을 마주칠 줄 알았다면 진작 모험심               을 발휘했을 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해리슨    오, 저런. 부친을 배신하고 친구를 택하다니, 참으로 몹쓸 아들이지 않습니까? (다수의 웃음소리, 잭도 함께 웃는                것을 보고) 해리슨 시모어라고 합니다. 이쪽은 내 친구들이지. 여긴 방직 공장을 운영하는 밀턴이고, 그 옆은 윌리               엄입니다. 참고로 윌리엄은 아주 근사한 새 지팡이를 자랑하고 싶어 하지요.

잭          (윌리엄의 지팡이를 보고) 말씀하신 대로 정말 근사한데요? 색과 무늬가 오묘하고 무척 잘 어울립니다. 목탄을 그               대로 깎아 코팅한 것 같네요. 요즘 사람들은 기술이 좋아서 이런 데 쓰는 유약의 품질도 훌륭하죠.

윌리엄    어떻게 알았습니까? (놀라운 기색) 보는 눈이 있군요. 그리고 이 지팡이는 몸통만 훌륭한 게 아니랍니다. 손잡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여 주며) 마감이 아주 괜찮은 수제 지팡이라고요. 이 장식도 진짜 은과 백금으로 만들었습               니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지팡이인데도 가치를 몰라 주는 사람만 주변에 가득했어요. (해리슨을 흘겨보면서 잭                 에게) 인제 보니 잭, 당신을 만나려고 그랬나 봅니다.

해리슨    날 왜 그렇게 보나? 자네가 얼굴 볼 때마다 그 이야길 하니까 그랬지! (웃음소리) 그러지 말고 새로 사귄 친구에게              프랑스에서 배워 온 기술도 알려 줘. 칸느 몽피에르인가 그거 있잖나.

윌리엄    칸 드 콩바일세. (잭에게) 혹시 지팡이술에 관심 있소?

잭          (헌터우드를 본다. 알아서 하라는 듯 턱짓하자 윌리엄에게) 들어 본 적은 있는데 잘은 모릅니다. 참, 편히 대해도                괜찮아요. (대뜸 헌터우드를 툭 치며)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면 우리도 넓게 볼 때 친구지! 안 그런가?

윌리엄    허, 이것 참 시원시원하군그래. 마음에 드는데?

 

 

 이후 윌리엄이 자신이 프랑스에서 배워 온 ‘칸 드 콩바’라는 지팡이술에 대한 열변을 토한다. 신문물을 접해 즐거운 듯 잭은 집중해서 듣고,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농담하며 웃는다. 완벽히 신사들의 세계에 물든 모습이다. 잠깐 이야기를 듣던 헌터우드는 지루함을 못 이기고 샴페인과 함께 벽으로 향한다.

 한 시간 후 잭이 헌터우드에게 다가온다. 처음보다 훨씬 긴장이 풀린 듯 보인다.

 

잭          (혼자 실실 웃으며) 진짜 재밌는 일 있었는데 들어 보실래요?

헌터우드 뭔데.

잭          (귓가에 대고 조용히) 다들 제가 진짜 부잣집 막내 도련님인 줄 아나 봐요. (헌터우드가 밀어내자 순순히 떨어지며)              저는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런데 다들 저에 대해 맞혀 보겠다고 이것저것 대는데 정말 놀랐다니까요! 다들 제가 근               교에 커다란 가게를 여럿 가진 사람인 줄 알아요. 나중에 살롱에서 마주치면 곤란할지도 모르겠어요. (말은 그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

헌터우드 (귀찮아한다) 잘됐네. 살롱에 대한 건 어떻게 됐어?

잭          해리슨 씨랑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대화하기로 했는데요. 그분이 런던의 제일 큰 살롱 오너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요. 여러모로 잘 맞을 것 같아서 벌써 만남이 기대되네요. (이제는 의식하지 않고도 정중한 화법을 사용한다)

헌터우드 (만족스러운 듯이) 그 친구는 술에 약해. 브랜디를 들고 가면 놀리고 있던 점포 정돈 받을 수 있을 거야. 뭐, 어쨌                  든……. (손을 내밀며) 수고했다. 무식한 놈 힘들게 가르친 건 나지만.

잭          (손을 맞잡고 흔들며) 무슨 이 좋은 날 그런 소리를~ 오늘 집 가고 더는 안 볼 사이 아닌데 뭘 새삼스레 그러세요!                (맞잡은 손을 당긴다. 예상치 못했기에 헌터우드는 속절없이 끌려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분들이라면서요? 다 들               었어요. 그러면 안 되죠. 친구를 소중히~ 온 김에 좀 더 얘기하고 갑시다!

헌터우드 (난색) 아니, 아, 아니. 난 싫어.

잭          (헌터우드와 어깨동무한다) 아니긴 뭘 아니래? 부끄러워하시기는~ 가서 따악 한 잔만 더 마시고 집에 가요. 예? 아, 보내 준다니까. 갈 때 가더라도 한 잔만 더 하고 갑시다~

 

 잭이 막무가내로 굴자 헌터우드는 막을 도리가 없다. 나오기 전 귀찮다는 이유로 식사를 거르고 나온 탓이다.

 그는 낭패라는 표정으로 잭에게 이끌려 다시 해리슨, 밀턴, 윌리엄이 있는 곳으로 이송된다. 그들은 선내 클럽에서 나가 야외에서 바닷물과 음악, 그리고 당구를 만끽하고 있다. 퇴장.

 

 

─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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