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렐리의 소나타.
플로어 램프의 깜박거리는 빛이 안락의자를 감쌌다가 떨어지길 반복한다. 머리칼 끝을 등받이에 걸어둔 B의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졸음 실린 눈이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 끔벅인다. B, 정면을 바라본다. 깜박, 깜박. 깜박. “그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날 사로잡았어.” 미소 지은 여자가 몸을 일으키자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뱀처럼 미끄러진다. “크게 소리 내서 읽어 보자…. 재미있겠지? 존 던은 크게 읽어야 한단다. 바흐의 둔주곡처럼.”
장면 전환. 짙은 색 나무 책장과 빼곡히 들어찬 서적들 사이에서 N이 모습을 드러낸다. 책상 위에 매달린 녹색 램프가 깜박거리기 시작한다. 남자가 황급히 걸어가 램프를 끈다. 카메라가 뒤돌아선 N의 램프빛 눈동자를 잡는 순간, B가 큰소리로 낭송하기 시작한다. “모든 인류는 한 권의 책과 같아서, 한 사람이 죽었다고 그 장 전체가 없어지지 않고. 다만 더 훌륭한 문장으로 가꾸어질 뿐이야.” N의 손에는 두어 권의 책이 들려 있다. 모두 하나같이 아름답게 장정한 것들로, 지난달 B가 편지를 통해 요청한 책이 마침내 서점에 들어온 참이다. “모든 문장들이 훌륭히 다듬어져야 하므로 하느님은 여러 감수자들을 두셨다. 오래되거나 좋지 않아서 바뀌는 문장도 있고.” B가 잠시 쉰다. N은 집중하여 책의 흠집이나 제본 상태 따위를 살피고 있다. B, 어렵사리 그 단어를 발음한다. “전쟁이나… 법 때문에 바뀌는 문장들도 있었다.” 음악이 멎는다. 정성스레 표지를 쓸던 N의 손길도 함께 멈춘다. 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늦은 밤의 서점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다. B는 계속해서 방 안을 서성인다. N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어느새 낭송이 끝난다. B, 경탄에 젖은 얼굴로 책을 내려놓는다. “좀 더 읽고 싶었지만 문장이 여기서 끝나고 말아…. ‘선정된’ 산문이잖니. 나르시스, 서점에 존 던의 설교문 전집이 있을까? 읽을 수만 있다면 장정이나 상태가 나빠도 괜찮아.”
낮. 포장된 책을 앞에 두고 편지를 쓰는 N. 해가 잘 들지 않는 서가 안쪽에서 그의 램프만이 빛을 발한다. “친애하는 블랙. 던의 설교문 전문은 그의 전집에서 구할 수 있을 겁니다. 40권이 넘는 전집 중, 상태가 썩 좋지는 않은 네 권을 저희 서점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잘 관리된 전권을 보내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그는 못내 아쉬운 듯하다. 그것은 충실한 직업 정신에서 비롯된 감정이기도 하고, 바다 저편의 누군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B, 기쁨과 함께 화답한다. “부디…. 내가 흩어져 있는 책장들을 거둘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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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플랫폼을 걷는다. 그곳은 은막 위다. ‘용서해 줘요.’ ‘뭘 말이죠?’ ‘전부 다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눈 속의 먼지를 빼준 것과, 당신을 사랑한 것과, 불행하게 만든 것을.’ 어두운 극장 안에 B가 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여자의 답을 기다린다.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린다.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린다. ‘날 용서해 준다면 나도 용서하죠.’ 여자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려 하고. 빛이 B의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 ‘목요일이에요.’ 그는 열차에서 내려 발밑의 지저분한 인도를 걷는 상상을 한다. “내가 아는 한 기자는 전쟁 중에 런던에 있었는데, 여행객이 어떤 기대를 안고 런던을 찾든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곳이랬어. 나는 책 속의 영국을 보고 싶다고 했지.” B는 여전히 은막에 시선을 뺏긴 채 중얼거린다. “그것도 찾을 거랬어.”
N은 동료와 함께 새로 구입한 장서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상자에서 책을 한 권씩 꺼내 저자의 이름을 읊는다. 책등을 살피고, 건네고, 받고, 적고. “블랙, 기쁜 소식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옥스퍼드 시를 구했어요. 인도지에, 파란 천으로 제본한 1905년 책이죠.” 책등을 살피고, 건네고, 받고, 적는 과정이 반복된다. “책 앞장에 서명이 있지만 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가격은 2달러입니다. 책을 이미 구하셨을까 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다음 책을 꺼내 책등을 확인한 N의 목소리가 밝아진다. 미소가 떠오른다. “언젠가 뉴먼의 대학론을 요청하셨죠. 초판을 보내드릴까요?” 책상의 B, 즉각 답한다. 철제 다리를 쓴 현대풍 책상 위는 갖은 종이 뭉치들과 읽다 만 책들로 비좁다. “부디! 아, 내 마음을 아는 건 당신뿐이라니까.” 가죽 장정을 쓰고 금 도장 찍힌 고서는 곧 B의 손에 들리게 된다. 표지를 손으로 쓸어 보고, 내지의 냄새를 맡아 보는 B.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다. “나르시스, 훌륭한 작품을 읽을 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글을 쓸 때 난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지.” B의 책상에는 자신이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이 비슷하게 쌓여 있다. N, 마찬가지로 책상에 앉아 있다마는 예스러운 목제 책상 위는 단출하다. 펜 몇 자루와 최소한의 사무용품 정도뿐이다. 손에 편지를 들고 있다. 기분 좋은 종이의 질감이 생생하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당신은 지금 분명히 살아 계신 것 같습니다.” B,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드럽게 대꾸한다. “괜찮아. 가 본 적 없는 나라를 그리워할 수 있다니.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야?” N은 드물게 고집스럽다. “제가 성실한 독자라는 건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블랙. 저 역시 책 속의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가 본 적 없는 나라와 만난 적 없는 이를 그리워할 줄도 알죠.” 드물게. 파도가 몰고 온 모래알처럼. “당신처럼요.” 동시에 그것은 거의 속삭이는 것 같다. B는 타자기에서 손을 떼고, 묘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B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조금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두었던 담뱃대 끝이 부러진다. “아!” 작게 외친 B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려 한다. 카메라는 다시 N의 낯을 비춘다. 깊은 눈. 언젠가 B가 이렇게 적은 적 있다. N은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를 상상해 본다. “우린 모두 뭔가를 기다리며 사는 거래요. 나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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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블랙. 소식을 들어 기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늙었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군요. 올여름엔 평소보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여름이 즐거웠습니다.” 한 청년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몰며 N을 스쳐 간다. 60년대.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 “젊은 여행자들이 카너비 가를 순례하고, 우린 멀리서 순례자들을 구경하죠.” 그것은 막을 수 없는 것….
“당신도 이 젊음의 거리를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장면 전환. 밤중의 헌책방. 어느새 N은 홀로 남는다. 코트를 걸치고 책상 위의 종이를 그러모은다. 그의 머리 위에서 녹색 램프가 아직 빛나고 있다. 장면은 지속한다. “…와는 연락이 끊긴 지 좀 됐습니다. 몇 년 전까진 성탄 카드를 보냈는데, 요즘엔 통 소식이 없습니다.” 시간은 으레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흩트려 놓기 마련이다. “모두를 대신해 안부를 전합니다.” 낱장들을 서랍에 넣으려던 N, 무언가를 발견한다. “나르시스가.” 발신인과 수신인이 같은 편지 몇 뭉치다. 그는 뚜렷하지 않은 어떤 얼굴을 하고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이내 나설 채비가 끝난다. 그리고 걸음을 옮긴 순간. 그가 이만 돌아가려던 때. 그가 떠나려던, 탈리아 블랙의 편지들이 다시 서랍 속에서 잠들려던 순간.
타자 소리.
그것이 남자를 붙든다.
N. 그는 어째서인지 사위가 조용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목소리. “나르시스.” 그 목소리. “아직 거기 있니?”
늙은 서적상의 낯이 환희에 차기 시작한다. 너머에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으나 너무나도 친숙한 이가 자리에 앉아 있다. 여느 때처럼. 활자. 책상 위 가득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B는 익숙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커다란 창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도심의 자동차 소리가 섞여 든다. “우린 아직 살아 있잖아. 그렇지?…. 하퍼스 잡지사에 원고를 팔았어. 3주 동안 고생하고 겨우 200달러 받았지만 이제 내 이야기를 하퍼스에 실을 수 있게 됐지.”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인 B는 궐련과 라이터를 집어 든다. “당신은 어때?” N은 1, 2초쯤 답하지 못한다. 그는 가까스로, 가까스로 혀를 움직인다. “예, 우리 모두…. 모두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여름을 보냈지만 여전히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합니다.” B, 비뚜름하게 웃는다. 이때, N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훗날 B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진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의 그들은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자, 들어 보렴. 어느 비 오는 일요일에 한 어린 친구에게 오만과 편견을 소개했는데, 지금은 제인 오스틴에 푹 빠졌단다. 생일이 10월 말쯤이라던데.” 활기. “오스틴 작품 좀 구해 주겠니?” B는 즐거워 보인다. N 역시. “친구분 생일 때까진 좀 어려울 것 같군요. 미국,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저희 서적들을 많이 구입해 가시는 바람에 현재 서점의 재고가 바닥나서. 그래도 성탄까진 구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아주 익숙하게 답한다. B, 말없이 웃는다. 조금 더 침묵하다가 다시 말한다. “그리고 날 위해 한 권만 더 찾아 줘.” N,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이다. “제목이나 저자 따위를 설명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책을 아니까.” 그는 다른 때보다 더욱 생기 있어서, 마치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다. 빛이 N의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 모든 것이 화면 밖으로 사라질 것만 같다. “해 줄 수 있잖아.” 사라질 것만 같다…. B의 낯에서 무언가가 엿보이는 듯하다. 그는 집요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라신다면, 무엇이든 찾아 드리겠습니다.” N도 마찬가지다. 깊은 눈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거리는 것만 같다. “여전히, 만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것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듯이….
그가 미소와 함께 작별한다.
“사랑을 담아, 나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