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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는 이달 둘째 주 토요일에 그녀가 목도했던 일의 엔딩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 아침 그녀의 집 앞에 배달된 신문을 펼쳤다. 이 주 만에 1면에서 밀려난 기사는 3면의 좌측을 차지하고 있었고, 자극적인 사진과 문장들로 도배되었던 지난주와 달리 이제는 경찰의 수사 현황과 사건의 전말이 무감각한 단어들의 나열들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유명 배우 B 양의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럴 리가! 클림트는 습관대로 입술을 말아 물며 기사의 다음 줄을 눈으로 좇았다.

 

 

‘C 양의 신고로 경찰이 맞은 현장에는 두 명분의 혈흔이 존재했다. 하나는 C 양이 주장한 첫 번째 피해자 R의 혈흔이었고, 다른 하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던 B 양의 것이었다. 경찰은 해당 저택에 R이 살았던 흔적은 찾지 못했다며 C 양의 진술 중 일부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착각이라고 판단했지만, C 양의 반복적인 항변으로 이튿날, R의 시신을 수색하는 일에 나섰다. 그러나 B의 저택에는 사람의 것이라 보기 힘든 작은 사이즈의 유골 하나만이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C 양의 약혼자이자, R의 오랜 친우였던 A의 증언으로 해당 유골은 R의 것으로 추정되어 999번 스트리트에 위치한 묘지에 묻혔으나, 유골을 발견할 당시 현장에 존재했던 신문사의 목격 증언을 들은 수의사 1인은 해당 유골은 원숭이의 유골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R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우였을 C 양과 A의 결혼이 성급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자 간의 불화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신경질적으로 던져진 대본집의 끈이 풀리며 사방으로 종이가 흩날렸다. 낱장 중 하나를 손에 주워 든 레이몬드는 바로 방금까지 쓰고 있던 모자를 집어 던진 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안 될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머저리들이 보는 눈이 없는 거지. 감히 어디 내 대본을… 벌써 노망이 난 게 틀림없어. 봤어? 영화 찍고 있던 여배우. 걔가 입고 있던 드레스 말이야, 예전에 내가 입었던 거랑 똑같이 생겼어. 그런 주제에 어떻게 나를 이렇게 홀대할 수가 있지?」

 

 촬영 현장의 간이 의자에 앉은 채로 감독이 돌아오길 한참 기다린 벨에게 돌아온 것은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냉담한 대답뿐이었다. 감독은 제작비나 일정 같은 고리타분한 이유를 들이대며 벨의 기분을 달래보려고 했으나, 그녀에게는 당장 영화 촬영이 시작될 수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벨의 모자를 소파 등받이 위에 올려둔 뒤, 레이몬드는 벨의 즐겨 피우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렸다. 익숙하게 불까지 붙여둔 다음에는 양주잔과 양주를 꺼내왔고, 소파에 반쯤 누울 듯 앉은 벨의 앞에는 당연한 듯이 누런 양주 한 잔과 재떨이가 놓였다. 건너편에 자리 붙인 레이몬드의 손에도 잔이 하나 들렸으나, 벨의 것과 달리 그의 잔에는 반이 겨우 되는 양의 술만 채워져 있었다.

 곧 ‘그걸’ 하려나. 담배를 두 모금, 그리고 이어 술을 한 모금,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벨의 입을 담배와 술이 번갈아 가면서 충분히 채웠을 즘,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지럽게 일그러지더니 눈물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벨은 몇 모금 피지 않은 담배를 그대로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을 터였다. 그리곤 잔이 비었다면 신경질을 부릴 테고, 얼굴에 흐른 눈물이 굳어 눈물자국이 생길 즘에야 손수건을 달라고 그를 재촉하리라. 그전에는 건네준다 한들 제대로 받아 들지도 않으니, 그로서는 애써 그녀를 배려하며 손수건을 챙겨줄 까닭이 없었다. 한치의 빗나감 없이 그 일련의 과정을 끝마치고 나면, 벨은 마치 시종을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레이몬드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의 뺨을 감싸기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는 애정 어린 시선도 없는 키스를 하고 나서야 그녀는 숨을 고르게 쉬었고, 레이몬드는 남은 뒷수습을 하기 위해 벨의 손에 옷깃을 붙들린 채로 자리를 지키곤 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다름이 없었고. 벨의 개인 자산으로 구매된 수많은 레이몬드의 정장들은 본래의 주인은 그가 아닌 그녀인 것처럼 벨의 손에서 엉망진창으로 구겨지기 일쑤였다.

 

 「아직도 각본이 필요하십니까?」

 

 레이몬드가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떼어내며 물었다. 벨의 턱을 쥔 손짓이 우왁스럽진 않았으나, 평소 그녀가 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려주던 그였기에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현실로 뚝 떨어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벨이 대답했다.

 「필요해.」

 기실, 그는 꽤 지친 상태였다. 혹은 지루했거나. 미쳐버린 여인과 함께하는 저택 살이가 지지부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창가에 놓인 파이프 오르간도 사흘 전부터 음정이 도저히 맞질 않아 칠 수 없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새 대본을 쓰죠. 시작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한 여인이 공중전화를 붙든 채로 고함을 지르고 있다. “사람이 죽었어요! 1000번 스트리트요! 미친 여자가 총으로 사람을 쐈어요!”」

 벨은 턱짓하며 다 마신 잔을 탁자 위에 올려 뒀다. 평소라면 신경질적으로 벽에 던져 깨버릴 텐데 웬일로 조용하다. 그 넓은 저택에 레이몬드 목소리만이 울릴 뿐이다. 집사 하나 없는 그 저택에서 깨진 컵을 치우는 건 역시 레이몬드 몫이었다.

 「배우에 영 재능이 없네.」

 일급 500달러라는 터무니없는 제안에 겨우 그 정도? 라고 답했던 벨은 정말로 매일 꼬박꼬박 500달러를 현금으로 레이몬드 앞에 던졌다. 그녀는 가진 게 돈뿐이고, 매일 밤 화려한 복귀를 꿈꾸던 –컴백이 아니냐는 레이몬드의 물음에 벨은 온갖 욕과 저택의 물건을 다 부수고 겨우 진정했다- 벨이 몇 년을 걸쳐 썼던 대본도 레이몬드에게 흔한 내용이었다. 의견을 피력했더니 날아온 와인잔에 죽을 뻔했다.

 「살인극은 지루해.」

 「겨우 첫 줄 듣고 의견을 말합니까?」

 「...계속해.」

 벨은 다시 입을 다물고 소파에 늘어졌다. 그녀의 집중력은 벌써 한계가 임박했다. 발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빨간 구두가 바닥에 떨어졌다.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익숙한 듯 –물론 꽤 오랜 기간이 걸렸다.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다- 이야기가 계속된다.

 「스트리트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사람들은 웅성거린다. 이윽고 경찰은 ‘살인사건? 아니, 명백한 자살 사건이다.’ 라며 조사를 종결한다.」

 공허한 삶을 살던 미친 여자가 드디어 연인을 죽이고 자신의 머리통에 총알을 쑤셔 박은 것이다. 한참 조사하던 도중 그 연인에겐 다른 내연관계가 있었고... 분을 이기지 못한 여자가 결국 남자를 죽이고 따라 자살한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죽으면 어떡해? 내가 나올 장면이 없다고!」

 「필요 없는 장면입니다.」

 「그걸 왜 네가 판단하니?」

 벨은 막무가내로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 도와준다며! 신경질적으로 책상 속 서랍에서 리볼버를 한 자루 꺼냈다. 구두 한 자루만 벗겨져 책상까지 가는 데 한참의 시간을 소비했다.

 「함께 있어 준다고 했잖아. 날 미워하지 말아줘.」

 질릴 대로 질린 레이몬드는 쉽게 결론으로 도출할 수 있었다. 술기운이다. 딱히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미쳐버렸지만, 커다란 저택 속에서 몇십 년 전의 러브레터를 읽고 또 읽으며 주장하는 복귀를 소망했다. 어린아이 같은 글씨로 대본을 쓰고 또 쓰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침대에는 소중한 원숭이 –이름은 캐서린, 과거 맡았던 배역 중 하나다 이미 시체 상태다 레이몬드는 여기서 그녀가 미쳤다고 확신했다-를 끌어안았다.

 「그건 언제 샀습니까?」

 「네가 다른 여자랑 데이트할 때.」

 「또 착각입니까? 내려놓으세요.」

 「싫어!」

 권총을 쓸 줄도 모르는 벨은 한참 방아쇠를 당겼다. 틱틱거리는 소리만 저택을 울려 퍼질 뿐이었다. 긴 한숨과 함께 레이몬드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를 다루는 방법을 진작 터득했다. 무한한 믿음, 약간의 애정, 그에게 쉬웠으나 이젠 지쳤다. 매일 받는 500달러로 캐리어를 꽉 채운 지 오래다. 캐리어에 채워진 달러를 보고 레이몬드는 지루함을 느꼈다.

 「난 너와 달라.」

 「당연한 말입니다.」

 「나는 다시 빛날 거야. 모두가 나를 찾고 있어!」

 계단을 타고 방까지 뛰어간 벨은 리볼버를 장전했다. 그녀는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아무것도 남길 수 없음을. 반대로 그의 죽음 역시 그녀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함을. 그간 연인 행색은 전부 어린아이 투정임을, 제 머리에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그 전에 그의 심장을 겨눠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그녀는 정말로 우리가 사랑했다고 믿었다. 후에 사랑스러운 연인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지막 대사였다. 이윽고 조용한 저택에 발포음으로 찢어졌다. 죽은 캐서린도 눈을 뜰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다.

 

 

이제 수 천장의 사진이 찍히겠지.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조사할 때 저택을 들어가 보니 온통 그녀의 사진뿐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뒤늦게 벨 밀러의 작품을 찾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과거의 여배우’, ‘찬란한 여배우’라며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한 그녀의 유작을 다시 보며 극장에 새롭게 걸렸다. 그 고리타분한 감독도 감독 의자가 아닌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 번이라도 더 같은 작품을 찍고 싶었다며, 그녀만을 위한 대본이 있다며, 벨 밀러를 연기하기 위한 배우를 섭외해 영화가 걸린 게 사건 종결 후 이듬해의 일이었다.

 

그 대본의 작가 이름은 R이었다. 이니셜 말고 아무도 남지 않아 처음에는 수사하는 도중 피해자와 동일 인물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사건 종결과 함께 사그라졌다.

 

 

 

“ 레디 액션! ”

 

시끄러운 현장 속 감독의 한마디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원피스를 입은 한 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공중전화에 동전을 한 움큼 집어넣는다. 이윽고 낮은 경찰 목소리, 여인은 식은땀을 훔친 채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

 

“ 사람이 죽었어요! 1000번 스트리트요! 미친 여자가 총으로 사람을 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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