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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곰팡

 캠벨의 이름을 쓰는 어린 공주가 현재 로마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 하나와 로마의 훌륭한 소시민 중 하나로 기능하고 있는 헬리아 선셋이 벤치에서 잠든 여자애 하날 발견한 사실은 어쩌면 연관성이라곤 전혀 없는지도 모른다. 자고로 공주라는 존재는 열두 겹 이불 위에서라도 그 밑에 깔린 완두콩 한 알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존재가 아니던가. 적어도 헬리아 선셋이 찬란한 수식어들과 함께 지면에서 만나 온 공주라는 존재들은 늘 그랬다.

 

 그리고 그런 공주들은 분명 벤치에 누워 머리칼을 엉망으로 흩뜨리지도 않을 것이고, 이런 곳에서 알 수 없는 시어들을 흥얼거리지도 않을 것이며, 몽롱하게 풀린 눈을 뜨고는 자신에게 "곁에 앉아도 좋아." 같은 말 같은 건 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은연 중 사람을 하대하는 것 같은 그 말투만이 '공주다웠'다.)

 

 "너 웃긴다, 얘! 집이 어디야? 이기지도 못할 술은 왜 마시고 여기 누워 있는 거야?"

 

 앉아도 좋다는 공주의 흔쾌한 허락을 무시한 채 헬리아는 위니프리드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의외로 공주는 순순히 부축을 받아 몸을 바로세웠다. "이 시 알아?" 노래하듯 말하던 시어들의 마지막 단어가 혀끝으로 툭 떨어진 뒤에야 나온 물음에 헬리아는 잠시간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이 여자애가 대체 뭐라는 거야? 너 지금 어디서 자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는 거야? 황당함을 기반으로 한 많은 생각들이 둥실둥실 떠올랐지만 헬리아는 그것들 중 그나마 입밖으로 꺼내기 적합해 보이는 말을 중얼거렸다. "잘 입고, 잘 배워놓고도 여기서 잠을 잘 수 있다고⋯?"

 

 어둠 속에서는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시선의 색깔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당장 헬리아 본인의 레몬빛 금발도 거리의 음영에 묻혀 칙칙한 회색빛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빛이 균일하지 않아 위니프리드의 이목구비가 어떤 모양새인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건 사실 위니프리드가 꼭 어린 아이의 장난감 오뚜기처럼 상체를 흔들고 있어서 더 그랬다.) 헬리아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위니프리드의 상반신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어떤 의지의 표명처럼 입고 있던 코트의 앞을 단단히 여미고 끈으로 허릴 졸라맸다. 어쩔 수 없지. 이 여자앨 여기다 버리고 갈 순 없잖아!

 

 빈 거리를 주행하는 불빛을 향해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들면 헬리아의 까치발에 응답하듯 택시 한 대가 부드럽게 인근 가로등 아래 정차한다. 축 늘어진 위니프리드의 몸을 일으켜 세울 즈음 헬리아는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자신보다 신장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 놀라운 깨달음은 아니지만서도 헬리아는 이럴 때마다 소리 없이 탄식했다. 주여, 제게 십 센티만 더 내려주시면 안 됐던 걸까요? 오 센티라도! 그래야 이 흥청망청 취한 여자앨 좀 더 잘 부축할 수 있을 거 아녜요! 물론 그런 외침이 정말로 하늘에 닿았단들 진작에 성장이 끝난 몸에 기적이 일어날 리 만무했지만.

 

 택시의 뒷자리에 짐짝처럼 실려도 위니프리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헬리아는 목적지를 알아내겠다는 일념하에 그녀의 옷깃과 어깨를 붙잡고 머리가 울리도록 흔들어보기도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이봐, 아가씨들. 밤이 깊었어. 나도 집에 가야해. 택시기사도 집과 가족이라는 게 있고⋯." 기어이 운전석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헬리아가 결국 백기를 든다. "마구타 51번지!" 자신의 한 칸짜리 자취방에 공주를 모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여자가 그렇게 외쳤다.

 

 불행하게도 나선의 계단은 헬리아의 방으로 통하는 필수 코스였으므로 택시에서 내린 뒤에도 난관은 계속됐다. 공주는 잘 걷는가 싶으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벽에 이마를 대고 있었고 또 계단을 오르는가 싶으면 평지를 걷고 있었다. 밤이 깊지 않았더라면 헬리아는 진작에 위니프리드의 귓가에 대고 고함을 꽥 질러 반강제로 그녀의 정신을 깨웠으리라.

 

 객관적으로 위니프리드가 거구의 몸집을 가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리아는 나선 계단의 절반쯤 올라왔을 때 결국 그녀를 계단 중간에 앉히고 난간에 고개를 기대게 했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위니프리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알 수 없는 울분이 차올랐다.

 

 "아무튼 힘들어 죽겠어.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람!"

 "여긴 어디야⋯. 엘리베이터는?"

 "그런 게 어딨어! 네 발로 걸어야 해. 고작 2층 올라가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위니프리드의 고개가 아슬하게 미끄러지는 바람에 헬리아는 한 손으로 그녀의 고개를 받쳤다. 조심히 그녀의 옆에 앉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면 큰 저항 없이 무게가 헬리아 쪽으로 쏟아진다.

 

 "방을 코앞에 두고 이게 무슨 꼴이람."

 "현기증이 나. 여기서 자도 돼?"

 "그건 안 돼. 아직 방까지는 계단이⋯ 어디 보자. 그래, 아홉 칸은 더 남았거든."

 

 "장미가 새겨진 실크 나이트가운 있어?" 위니프리드는 여전히 늘어지는 어투로 말했다.

 

 "한평생 나이트가운을 입어본 적도 없는 사람한테 물을 소리야, 이게?" 그리고 바로 따라붙는 헬리아의 황당한 목소리. "내 집엔 단추 달린 파자마 밖엔 없어."

 

 "그거 근사하네⋯." 객관적으로 근사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헬리아는 그렇게 대답하는 위니프리드의 목소리가 어쩐지 진실로 조금 들떠있다는 생각을 한다. "침대는?"

 

 "그건 하나 밖에 없는데."

 "괜찮아. 내 침실에도 침대는 한 개야."

 "⋯네 방이 아니라 내 방인 게 문제고, 난 널 카우치에서 재울 생각이긴 하지만, 뭐⋯."

 

 필연적으로 맞붙은 몸이 따뜻했다. 위니프리드의 뺨과 헬리아의 어깨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팔과 손등 따위가. 밤공기가 찬 계절은 아니었으나 돌계단에 앉은 두 사람이 나누기에는 온기만큼 적절한 것도 없었다. 다세대 하숙집에서 나이트가운 따윌 찾는 여자애가 다음날 이 상황을 어떻게 기억할지 헬리아는 문득 궁금해진다.

 

 어깨에 얹힌 고개가 아래로 조금씩 기우는 것이 느껴지자 헬리아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잘 거면 올라가서 자!"

 

 "그래." 의외로 순순히 위니프리드가 고개를 든다. 시선이 바로 맞았고 그제야 헬리아는 자신이 아주 단순하고 원초적인 질문 하나 없이 이 여자앨 척박하게 대했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는다.

 

 "이름이 뭐야? 그러니까⋯ 난 헬리아 선셋이야. 널 오늘 하루 방에서 재울 사람이고."

 

 그러면 여전히 무언가에 잔뜩 취한 눈을 한 여자가 흐린 초점을 애써 눈앞의 분홍빛에 집중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취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범인은 짐작도 못할 다소 작은 계기로도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해온다. 귓가에 보라색 방울이 톡톡 터지는 기분이라는 생각이 짧게나마 헬리아를 스치고 지나간다.

 

 "위니⋯ 그래, 위니라고 부르면 되겠다."

 "뭐, 그래. 충분하지!"

 

 "자, 그럼 가실까요, 위니 아가씨?" 부러 장난스레 말하며 헬리아가 몸을 일으켰고 덩달아 위니프리드 역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선다. 현기증이 이는지 휘청이는 위니프리드가 난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느라 헬리아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함께 춤추듯 흔들리는 작은 헤프닝이 있었으나 남은 아홉 칸의 계단이 보우하사 두 사람은 무사히 하숙집 2층 등반에 성공한다.

 

 이미 반쯤 감겨 있는 위니프리드의 눈동자 색이 어둠 속에서 잿빛이었는지 보랏빛이었는지 헬리아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단히 잠긴 걸쇠를 열어 단출한 자신의 보금자리에 그녀를 초대하는 동안 헬리아는 의식적으로 위니프리드의 눈을 한 번 더 들여다보려고 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라는 만고불변의 법칙 아래 위니프리드 역시 자유롭지 못한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파자마를 입은 채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여자애가 사실은 완두콩 한 알에 온 몸에 멍이 들었음을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막 영국 순방을 마치고 로마에 도착했다는 공주 위니프리드 제임스 켐벨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헬리아 선셋은 미처 알지 못했다.

 

 


 

 

글쓴이 료사  

 

널찍한 이국의 회랑 끝으로 위니프리드가 걸음 내디딘다. 공주의 짤막한 머리끝은 순방에 동행한 백작 부인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애써 다듬고 그 위에 보석 머리띠를 올려 겨우 세련된 모양을 한다. 폭이 넓은 드레스와 장신구에 가까운 레이스 장갑, 진주 귀걸이, 에나멜 구두. 흠 잡을 곳 없이 차린 공주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 앞에 단정히 섰다. 눈길이 모이는 것이야 익숙하되 개개인의 낯은 전부 눈에 설다.

  아니- 정확히 하나,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있다. 도열한 이들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키, 화사한 금빛 머리칼과 또렷한 눈동자. 사진기나 수첩을 손에 쥔 사람들과는 달리 금발의 여자는 빈손이다. 그저 명확히 위니프리드를 바라본다. 묘한 얼굴로….

  헬리아.

  위니프리드가 그 이름을 곱씹는다. 공주가 아직 인사하지 않았기에 늘어선 기자들은 웅성거리지도 않고 그가 입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헬리아 선셋, 맨 앞줄에 서 공주를 바라보는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니프리드는 그가 어떻게 소리 내 웃고 떠들고 산뜻한 목소리를 내는지 기억하고 있다.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어린 기자가 실은 나풀거리는 흰 치마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바로 어제, 지척에서 내내 보고 듣지 않았던가?

 

***

 

  가장 처음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헬리아 선셋의 침대 -1인용, 유일한- 를 막무가내로 차지하고 누웠을 때, 위니프리드는 아주 단단히 취해 있었으니까. 변명을 하자면 술에 취한 것은 아니다. ‘그린 듯한 공주이며 사려 깊은 왕가의 대변인이자 여왕의 착한 딸’인 공주는 애매한 시차와 쏟아지는 순방 일정, 외국의 왕족을 재단하듯 훑어보는 시선에 익숙했고 제 처지에 특별한 불만 또한 없었다. 그러나 누적된 피로는 의지와 관련 없이 옅은 불면을 초래했다. 한밤중 급하게 불려 온 의사는 지친 낯으로 누워 눈만 똘망하게 뜬 소녀에게 수면제 한 대를 놔줬다. 그 주사가 문제였다. 잘 맞지 않는 약이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니프리드 캠벨이, 그 밤중 트럭 짐칸에 타서 외국의 도시 한복판으로 도망치는 대담한 짓을 저지르겠는가? 소지품이라곤 장갑 한 켤레만 가진 채!

  자동차 바깥으로 아슬히 늘어뜨린 손끝에는 바람이 감기고 카페테리아의 야외 테이블에 앉은 시민들의 웃음 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가감없이 가까웠다. 로마, 신화 속 건물들이 여즉 살아 숨 쉬는 도시…. 머리 위의 별들이 어느 순간부터 소음에 맞추어 흔들리기 시작해 위니프리드도 답지 않게 들떴었다. 그래서 언젠가 외워두고 도통 꺼내보질 않았던 시구를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어느샌가 어딘가 단단한 곳에 누웠던 것도 같고, 그러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고, 귓가에 떨어지는 목소리와 맞닿은 체온에 좀 웃었던 것도 같고…. 분홍빛이 기억에 남는데, 뺨을 스치던 타인의 머리칼은 도통 무슨 색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둠에 묻혀서, 혹은 그제야 밀려온 졸음에 온통 취해서.

  그리고 잠에서 깨어보니 낯선 방이었던 거다. 단추 달린 파자마 -나이트가운이 아니었다, 놀랍게도!-를 입은 위니프리드가 상황 파악을 하려 눈을 열심히 깜박여 볼 때, 헬리아 선셋은 바로 그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던 거다. 흰 원피스를 입고, 하나로 땋은 머리끝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아마 그 때서야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명확히 바라봤던 것 같다.

  헬리아 선셋의 머리칼은 밝은 레몬빛이었다. 위니프리드 캠벨의 눈동자는 차분한 보라색이었고.

  “위니 아가씨,” 그제야 어렴풋하게 제 이름을 그리 소개한 기억이 난다. “내 이름은 기억해?” 헬리아 선셋이 장난스럽게, 그러나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음,” 위니프리드는 한참을 고민한 뒤에야 가까스로, 생김에 걸맞는 그 애 이름을 기억해낸다. “…헬리아?” 처음으로 발음한 이름은 생경한 울림으로 입 안에서 굴렀으나, 동그랗게 떠졌다가 곧 웃음기 머금고 휘어지는 분홍빛 눈매를 본 위니프리드는 제가 올바르게 불렀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그리고 또 공주답지 않은 부스스한 웃음을 흘렸던 것 같다.

 

***

 

  “여기서 또 만났네?”

  남의 한 칸짜리 하숙방에서 멋대로 잠을 청한 것을 시작으로, 위니프리드 캠벨은 어쩌면 ‘올바른 공주처럼’ 구는 일을 잠시 멈춰두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책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평생 길게 기른 머리를 삭둑 잘라버리고, 어쩐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해바라기 한 송이를 덜컥 사고, 대사관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이 광장을 기웃거리는 바보 같은 일을 할 리가 없다. 결과적으로 헬리아 선셋이 공주를 다시 만났을 때, ‘위니’는 한 손에 젤라또 콘, 반댓손에는 꽃 한 송이를 쥐고 광장 계단에 앉아 있었다. 헬리아의 황당한 눈길이 위니프리드의 드러난 귓가와 양손에 쥔 물건들에 오래 머물렀다.

  “안녕, 헬리아.” 그건 헬리아의 주머니에서 나온 ‘귀가비’의 잘못된 쓰임이었기에 위니프리드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실없이 웃는 여자애라고 헬리아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상 위니프리드 캠벨이 평소에 짓는 웃음은 그린 듯 입매만 살짝 올리는 게 전부였음에도.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해….” 흐릿한 기억에도 지난 밤 신나게 평어를 썼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고, 이제 와 말을 도로 높이기에도 멋쩍어진지라 두 사람의 대화에는 다소 격식이 없었다. 어쨌든 손에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무게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이왕 나온 김에 조금 더 놀다 가지 그래?” 그러니 무게 없는 말끝만큼, 헬리아의 제안도 가볍고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위니프리드가, 지난 밤만큼은 아니지만 다소 꿈꾸듯 되묻는다.

  “하고 싶은 일이 뭔데?” 헬리아가 키득거렸다. “머리를 자르거나 아이스크림 사 먹는 거?”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거리를 구경하고, 빗속을 걷거나….” 말하다 보니 전부 소박하고 시시한 일들처럼 느껴져 공주는 말끝을 흐리고 만다. 그러나 스페인 광장의 계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오던 헬리아는 마지막 몇 단을 폴짝 뛰어내리며 빙글 돌아 위니프리드 앞에 섰다. 해바라기를 제 손으로 옮기고 빈손을 맞잡는다. “재밌겠는데? 그거 다 하고 들어가면 되지. 우리 둘이 같이.”

 

***

 

  다시 회랑에 서서, 이 자리에서 먼저 부를 수 없는 이름을 혀 끝으로만 곱씹으며 공주는 그제사 헬리아 선셋이 퍽 어울리는 이름을 가졌음을 깨닫는다. 공주보다도 화려한 색채를 가진 저 애, 꽃들 사이에서 해바라기를 단번에 골라들었듯, 인파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여자. 지난 하루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위니프리드는 헬리아가 이끄는 대로 온 로마 시내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태양의 빛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하기 마련이다….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는 내내, 위니프리드 캠벨은 제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공주임을 숨기기에 바빴다. 헬리아가 부르는 호칭- “위니, 이것 봐.” 짧고 격식 없는 애칭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 함께 웃음 섞인 비명을 흘리며 오토바이를 타거나, 쫒아오는 경호원들을 물에 밀어 빠뜨리며 말괄량이처럼 도망칠 때엔 정말이지 두 음절의 이름만이 어울렸다. 지난밤 위니프리드는 머릿속으로 수 번씩, 제 이름자를 짧게 줄이고 도로 이어붙이는 작업을 반복했다. 평범한 여자애 위니, 그리고 캠벨의 공주 위니프리드 제임스 캠벨…. 거짓말쟁이가 손을 넣으면 손목을 잘라간다던 석상 앞에서 위니프리드는 오래 고민하다 결국 손을 뒤로 숨겼다. 이제 와 어린애처럼 오래된 전설에 겁 먹은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면 공동 속 괴물이 냉큼 튀어나와 손을 콱 깨물고 사라질 것 같아서…. 그건 아마 원초적 공포보다는 양심의 가책에 가까웠을 것이다. 어렴풋이 친애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 여자애의 웃음을 앞에 두고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데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

  그러나 결국 진실의 입에 손을 물려야 했던 사람은 위니프리드 혼자만이 아니었다. 코트 소매에 숨긴 손을 꺼내보이며 웃음을 터뜨리던 헬리아는 석상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지금 위니프리드는 막연히 궁금해한다. 그리고 대사관 뒤쪽 골목에 선 택시 안에서 작별하던 순간에는 또 어떤 생각을 했을지….

  너는 어떤 감정을 안고 지금 그 자리에 서 있을까.

  질답의 끝에서 그린 듯 둥글리려던 입매가 우뚝 멈춘다. “어느 방문지가 가장 즐거우셨나요, 공주님?” 누군가 손을 들고 묻는다. 헬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위니프리드를 향해 있다. 기자들 전부 공주의 행동에 주목하는 중이기에 그 모습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위니프리드의 눈길이 한 사람에게만 머무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위니프리드는 애써 주위를 관망한다. “모든 방문지마다 특별한 추억이 있었지만-” 하지만 말을 이어가며, 결국 시선은 다시 금발의 기자에게 향한다. “로마가 가장 좋았어요. 이곳에서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그 모든 추억을 함께한 것은 눈앞의 거짓말쟁이 여자애 하나였기에.

  평생. 부드러운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공주의 드문 단언을 기자들이 바쁘게 받아적는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위니프리드는 잠시 헬리아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구분선 앞에 도열한 기자단 대표를 다시 눈에 담았을 때, 헬리아 선셋은 바로 끝자락에서 공주를 기다리고 있다. 악수, 짧은 소개, 다시 악수, 짧은 소개. 가감없이 담백한 과정이 반복되고,

  ‘위니’는 익숙한 감촉의 작은 손을 쥐고 아주 잠깐 멍하니 선다.

  “아메리카 뉴스 서비스의 헬리아 선셋입니다.” …그리고 이전 둘 사이에는 없던 정중한 경어에 도로 시선을 가다듬는다. 잠시 일렁인 시야에 옅게 휘는 분홍빛 눈매가 잡힌다. 헬리아는 맞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고, 그건 정확히 악수의 표준과도 같다.

  “로마에 방문한 기념으로 공주님께 이걸 드리고 싶은데요.” 그리고… …손바닥에 작은 종이 봉투를 건네며 짓는 미소는 표준의 정중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위니프리드는 잠시 울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도 ‘아메리카 뉴스 서비스의 선셋 기자’가 포기한 어떤 것일 테다. 헬리아 선셋이 위니에게 건네는 약간의 위트이자 선물….

  “정말 고마워요.” 공주의 말씨는 원체 담담한 면이 있어 그 사이의 옅은 흔들림이란 다른 이들은 눈치챌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헬리아의 뜨거운 손끝이 위니프리드의 손바닥을 스치고 떨어진다. 위니프리드는 뒤돌아 단상으로 올라간다. 인사를 모두 끝냈으니 뒤돌아볼 필요는 없으나 여자애는 결국 어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면 거기 영영 잊지 못할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이 있다. 분홍빛 눈, 하나로 땋은 금발. 지난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서 바라보고 섰듯, 회랑으로 길게 들이치는 햇살 아래 선명한 그 여자. 로마에 영영 남기고 떠나야 할 어떤 감정, 그러나 평생 잊지 못하고 가져갈 나의 추억. 위니프리드는 문득 저 애가 하나만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 밤 엉망으로 시를 흥얼거리고 네게 기대 계단을 올랐던, 단추 달린 파자마 차림으로 부스스하게 웃던,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던 어떤 여자애의 눈은 보랏빛이었노라고.

  위니프리드는 잘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내딛는다. 뒤편에서 인파가 흩어지는 기척이 난다. 구둣발 소리,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

  그러나 가장 걸음이 가벼울 한 사람만이 끝내 자리를 지키고 섰다는 것만큼은 보지 않아도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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