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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덴에게.

 

곧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잘은 모르겠지만, ‘바라는 건 마음을 지탱해주는 일’이라고 너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생각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을 거라고 믿어, 그렇지? 다시 만나면 많이 보고 싶었다, 고 말해도 되려나.

저번에 보내준 편지는 잘 받았어. 눈이 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우편이 늦어졌다는데, 답이 없어 네가 길게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답장해. 날이 많이 추운데 아픈 곳은 없으려나 걱정도 되고. 네가 이걸 받아 볼 때쯤이면 이미 봄이 됐으려나 싶어. 그때까지 부디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기를.

간밤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사실 어제만 그런 건 아냐. 여기 온 이래로 가끔 그래. 특히 자주 네가 배웅해주던 날 꿈을 꾼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거든. 플랫폼에서 발돋움하고 입 맞춰주던 거나, 그때의 네 표정이라거나, 그날 날씨, 멀리 기차 경적과 철로 소리 같은 게…. 잠에서 깰 때마다 아직도 방금 떠나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하면, 너는 어떤 표정 지어주려나.

 

촛불 아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사울은 이쯤까지 몇 줄을 적다가 잠시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추위에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고 뺨이며 코끝이 저릿하게 시렸다. 올해의 추위는 유난해서, 도저히 봄이 올 것 같지 않은 기분도 종종 들었다. 쌓인 눈 탓에 편지가 오가는 일이 한참씩 걸리는 일은 예사였다. 사울이 기차에 오르기 거의 직전까지 루덴은 계속 울었다. 원래도 눈물 많아 그럴 거라는 걸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보는 건 또 다른 이야기라 사울은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안 가면 안 돼? 물으며 소매 끝을 잡고 젖은 플랫폼 바닥에 뚝뚝 눈물방울 떨어트리던 모습이나, 결국은 꼭 돌아와야 한다며,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라 몇 번이고 당부하며 안아주던 게. 떨어지지도 않는 발걸음을 떼어 기차에 오르고서도 한참 시선 못 거두고 있자니 루덴이 발돋움하여 입을 맞춰 주었다. 치맛자락 아래로 볼품없이 마른 발목이나 빗물 엉긴 구두 굽이 그대로 보였다. 기다릴게, 말하는 그 애의 눈동자가 형편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조금 짠맛이 났다.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건 반갑지만, 가끔은 네가 꿈에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하려나. 하지만 잠에서 깨고 나면 여기는 아주 멀고, 네가 옆에 없다는 사실만이 선명하니까. 거짓말로라도 언제나 꿈에 나와줬으면 좋겠다, 고 쓸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네게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너는 편지 봉투 열어보는 순간부터 내 거짓말 따위는 한눈에 알아채 버리고 말 테니까…….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아픈 데도 다친 데도 없으니까. 날이 추워지는 바람에 종종 신발 밑창이 얼어붙는데, 그것 불편한 것 빼고는 다 괜찮은 것 같아. 어떨까. 그쪽은 많이 추워? 부족한 건 없고? 어려움 있다면 본가 연락해 그쪽에서 지내도 좋을 텐데. 어머니도 분명 네가 온다면 좋아하실걸. 두 분 다 은근히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지……. 너는 날이 추우면 곧잘 폐렴 같은 걸 앓으니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서.

여긴 해와 죽음이 같이 지는 이상한 곳이야.¹ 줄곧 함께 지냈던 사람이 없어지는가 하면, 누군가 새로 온다는 소식도 없이 옆자리에 다시 들어오고는 해. 저마다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여기까지 온 사연도 있고. 가끔 묻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네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적 있어. 두고 온 사람이 있냐고 묻길래,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기다린다는 정도만…….

 

동기들과 동그랗게 둘러앉아 밤을 보내면서 나눈 이야기였다. 고향에 기다리는 부모님이 있다는 사람도,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린다는 사람도 있었다. 차례가 돌아올 무렵 옆 사람이 사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매번 편지 주고받는 그 사람 분명 애인일 거야, 하는 눈치로. 찬바람이 한 바퀴 휙 불어 지나갔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기다립니다.

그러면 돌아가야지, 걱정되겠어, 하고 제 어깨나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 받으며 사울이 희미하게 웃었다. 중앙에 켜 둔 주홍색 등불 불빛이 얼굴에 드리웠다. 빛그림자가 오로라처럼 일렁거렸다.

날도 추운데 매일 플랫폼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냐, 우리 가족들은 그런다더라, 저번 편지에 사진을 함께 보내줬는데……. 그런 와르르 웃는 목소리와 잡담이 천막 안을 울렸다. 안 그래도 아일 가졌대서……. 말 끝나는 순간 그곳의 시선이 초록색 눈동자로 쏠렸다. 몇 초간 정적인 것 같았다가 그들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생일 이래 그렇게 많은 축하 받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지도 몰라. 곧 태어날 자식이 아빠 얼굴은 알아야지 않겠냐면서 날 당장이라도 제대시킬 기세던데.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고 했다가 호되게 한소리 들은 것 얘기해주면 네가 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했어. 여기 사람들은 어쩐지 회사 사람들이랑 닮은 구석 있어서, 종종 옛날 생각이 나.

잡담 나눌 시간도 없었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랑 한 건 오랜만이었는데, 입에 올리고 나니까 부쩍… 보고 싶은 거 있지. 너는 매번 내게 네가 없어진 이후를 상상하게 만들고, 그 이후의 삶 대비하라는 것처럼 굴었지만. 그게 안 미웠다면 거짓말이지만 네 마음 아주 모르는 것도 아냐. 그래도 전에 말했다시피, 마음 준 곳 이미 있으니까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걸.

꿈에 안 나오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느니 그런 말 했지만, 어쨌든 분명한 건 여기서도 나는 줄곧 네 생각을 한다는 거야. 부정할 여지도 없이 그게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다는 말로 편지를 쓰는데, 네게 부담이려나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보고 싶다거나 네 곁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그대로니까.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남은 삶은 너랑 함께하고 싶어.²

아프지 않고, 몸 건강히 잘 지내길 바라. 돌아가면 보고 싶었다고 입 맞추는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으려나. 또 편지할게.

 

 

사울.

추신. 남자아이라면 율리우스, 여자아이라면 시저…….

어때. 그 애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울.

 

영화에서나 사랑 때문에 죽는 거라고 하더라고.³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거든. 여전하셨어. 희한하게 내 안부에는 관심 없으시고 당연히 네가 죽었을 거라 믿으시는 눈치였어. 원래 그런 분이시니 멀쩡히 잘 지내는 약혼자를 묘비 밑에 미리부터 묻어버리는 기개에는 이제 슬슬 놀랍지도 않아. 돈 많고 앞날이 창창하다고 쓰고 물려줄 재산 많은 누군가와 날 결혼이라도 시키고 싶으신 모양이지만 그것마저도 뻔하다고 해야 하나. 정말로 이제는 괜찮으니까, 그분이 뭐라 하시든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그래도 역시 오랜만에 네 이야기를 하니까 보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보고 싶다, 고 써도 되는 거지? 딱히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최근에는 교회나 성당이라도 나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 이런 날이면 기도라도 하고 싶어지니까. 신이 계신다면 너를 보살펴 달라고, 제 곁에 무사히 돌려보내 주세요… 같은 그런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처럼.

 

한 문단을 쓰고 온점을 찍으며 루덴은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매섭게 오고 있었다. 사흘째 내리는 눈은 그칠 기미가 없어 온 세상이 눈에 파묻힌 지 오래였다. 길은 물론이고 거리의 건물까지 온통 눈에 덮여 전부 흰색이었다. 그나마 아직 기능하고 있는 거리의 가로등 불빛만이 이따금 깜빡이며 회색 도시를 비췄다. 검은 우산에 긴 코트 차림의 사람들이 종종 창밖을 지나가는 것 빼고는, 특별히 볼 게 없는 풍경이었다. 이곳도 저곳도 모두 비슷하게 눈에 파묻힌 광경이었으므로 그럴 만했다.

책상 위에는 여러 번 읽어 가장자리가 조금 너덜한 편지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전부 사울로부터 온 것이었다. 눈 막 오기 시작한 시점에 썼다고 했으니, 아직도 그가 무탈히 살아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목숨에 지장 없고 괜찮으니 염려 말라는 전보 받은 것도 얼마 전이었다. 병원 주소로 온 전보에 놀라 루덴은 급히 사람이라도 하나 보내야 하나 하다가 그만두었다. 분명 괜한 걱정 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랬을 것이다. 사울 노이드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게 믿기로 했다.

 

얼마 전에는 집에 오는 길에 처음으로 아기 옷을 하나 샀어.

정말 작은데…… 이걸 진짜 입힐 수 있는 걸까. 이걸 옷이라고 부를 수 있나 싶을 만큼 아주 작아. 모자나 신발 같은 것도 마찬가지고. 네가 같이 봤어야 했는데. 네 손에는 분명 더 작게 느껴질 테니까. 너는 이 애가 우리를 고루 닮으면 좋겠다 했지만, 난 역시 그래도 너를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걸. 아직 얼굴도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지만 너라면 그 앨 많이 사랑해줄 것 같으니까……. 돌아오거든 만나볼 수 있겠지. 그때의 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상상하기 어려워서 조금 기대된다고 하면, 약간은 더 희망차게 들릴까.

가끔씩 기차역에 나가. 사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들어오는 기차에 네가 타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면서. 플랫폼에는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특별히 외롭지는 않은 것도 같아. 승객들이 다 내리고 텅 빈 기차가 다시 차고로 들어갈 때가 되면 하나둘 같이 자리를 뜨거든. 그러면 집에 돌아오면서, 네가 오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아직도 내 곁에 없다는 걸 정말 새삼스럽게 깨닫고는 해. 온종일 눈 맞으며 플랫폼에서 널 기다리다 보면 종종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으니까……. 괜히 걱정할까 싶어서 적는 거야. 너는 언제나 너보다는 내가 우선이니까.

떨어져 있는 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걸까?⁴

 

배웅하던 날 기차가 아주 멀어져 점이 될 때까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나기 직전까지 사울은 자신을 기다려 달라거나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오랜 기간 떠나있을 것을, 그리고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기약 없는 이별 앞에 그가 꺼낸 말은 사랑해, 하나뿐이었다. 의심할 여지도 깊이를 잴 필요도 없이 명확한.

사울은 소매 잡힌 채 발걸음 떼지 못하고 플랫폼에 오래 서 있었다. 날이 흐려 조금씩 진눈깨비가 오는 중이었고, 품에 안은 루덴 머리 위를 손으로 조금 가려 주면서. 속눈썹에 엉긴 물방울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처럼 몇 방울 떨어졌다. 갈게, 짧은 인사 남긴 사울이 기차에 올라 플랫폼 내려다보았을 때 루덴은 다시금 그 소매 잡아 입을 맞추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가 한참 허리며 고개를 숙여 주었다. 입 맞출 때 그가 눈 뜨는 버릇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구태여 짚어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날은 그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루덴은 눈 감고도 알았다. 눈꺼풀 위로 닿는 초록색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이날의 헤어짐 오래 기억하고 있겠다는 것처럼 그랬다. 맞닿은 입술은 따뜻했다. 그리고 약간 단맛이 났다.

 

함께 살아간다거나 곁에 있어 준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몰라. 네가 떠나고 여기 없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나는 어느 때보다 더 네가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하곤 해. 너는 내게 말하지 않으려고 한 것 같지만, 병원에서 연락 왔던 건 제법 놀랐다는 건 말할래……. 이제 괜찮아졌을까. 당장에라도 찾아가 보거나 상태 어떤지 알려달라 채근하고 싶지만 대신 염려를 담아 쓴다. 사실대로 말하라고 해 봐야 너는 그러지 않을 것 같으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는 대신 듣기 괜찮은 좋은 말을 하는 데 더 재능이 있다는 것쯤 알아. 그러니 역시 아프지 않기를, 무사히 돌아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는 말만 쓸 수밖에는. 역시 새 종교라도 믿어야 할 만큼 사랑은 꽤 절박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 만약 이런 불순한 의도는 안 받아주신다거나, 순전하고 절실한 기도만 수리해주신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오늘도 기다릴게. 언제나 네 안녕을 우선으로 바라게 되니까. 내 삶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봄이 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여름 전까지는 돌아와 줬으면.

 

 

 

루덴이.

추신, 남자아이라면 율리안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무 늦지 않게 왔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금방 커버리니까.

¹²³⁴ 자끄 드미(Director). (1964). 쉘부르의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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