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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7월 20일, 인간이 처음으로―공식적인 기록으로는―달 위에 발자국을 남긴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우주는 더 이상 미지로 분류되지 않는다. 자연히 따르는 통상의 오만. 곧 인간은 우주 전체에 대해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오만이 불러일으킨 행성들을 향한 도약, 분석, 해체. 사람들은 검은 우주를 향해 쏘아지고, 단단한 방호복을 입은 채로 행성을 읽어내린다. 새로운 행성을 분석하는 일은 어떤 단체와 국가들로 하여금 마치 유행과 같이 이루어졌고, 테레시코프 일가는 그런 것에 발 한쪽 걸치는 일을 오래도록 해온 단체였다. 혹성 솔라리스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은 곳은 오롯 테레시코프만은 아니었으나, 결정권은 언제나 러시아의 그 일가에 있었다.

 

 여러 러시아 출신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이 우주로 쏘아올려졌다. 몇 달 뒤 도착한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본 테레시코프 일가는 외부에 있던 그들의 막내를 불러들였다. 첫째는 이제 그들의 리더였고, 둘째는 이곳에 필요한 이었으므로 셋째만이 모국 러시아를 떠나 며칠 혹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정에 동원될 수 있던 탓이다. 알렉산드라 이고레브나 테레시코바는 비슷한 이유로 몇 번즈음 우주 정거장을 오간 전적도 있었으므로 사건의 전말을 듣기도 전에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수락했다.

 

 솔라리스에서 과거가 물질화 된다느니 하는 보고서가 올라왔어. 첫째가 말했다. 몇몇 과학자가 단순한 정신 착란이 아니라는 첨언까지 덧붙여 거의 논문 수준으로 작성해 왔지. 둘째가 말했다. 그러니 확인해 보고 테레시코프가 손을 계속 대도 되는지 확인해 달라 이거로군? 셋째가 묻자 앞서 입을 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시코프의 막내가 지구를 잠시 떠나기로 결정된 날이었다. 알렉산드라는 흔쾌한 동시에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고, 일정에는 아무런 차질도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테레시코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은 얼마간의 시간 뒤에 솔라리스에 대한 방향을 결정할 만한 보고서를 읽게 된 것이다.

 

 ‘행성 솔라리스로 파견되어 일찍이 보고되었던 이상 현상에 대한 현장 탐사와 검문, 의학적 소견이 없는 객관적 판단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보고한다. 편의상 파견자 알렉산드라 이고레브나 테레시코바를 이하 보고자라고 명시한다.’

 

***

 

 러시아의 막내 알렉산드라가 솔라리스의 연구소에서 만난 과학자, 블라디슬라프 드보르제츠키에게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이곳 수석 연구원의 행방이다. 이것을 무엇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감사, 감시, 검열, 무엇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구태여 무엇인가로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방문인 것이라고 임시간 명명하기로 했다. 수석 연구원이 보이지 않던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왜지? 모르지, 그의 양심이 그러라 시켰는지, 원체 나약했던 것인지, 혹은 그 무엇도 아닌지! 당신이 직접 겪어 보면 알 수 있지 않겠소? 그 의미심장한 대답, 혹은 물음에 알렉산드라는 눈썹을 한쪽으로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 느릿한 대답. 그런 것 하나 경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니, 알만하군. 그 조롱어린 말에도 드보르제츠키는 별다른 말 없이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두고 보라는 듯이.

 

 시간이 지난다. 알 수 있는 사실은 한정적이고, 새로울 것은 없다. 글로 적힌 것을 입으로 뱉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들은 것과 읽은 것에는 큰 차이가 없어 알렉산드라는 제게 배정된 방에서 제 짐을 풀었다. 눈을 감았을 때, 기민한 감각이 그를 깨운다. 언제고 테레시코프 저택 밖에서의 수면은 솔라리스의 바다와는 비견할 수 없는 얕은 잠이다. 타인의 숨소리가 제 옆에 있음을 깨닫자마자 눈을 뜬다. 암순응을 마친 시야 안에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는 사람 하나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다. 선명하지 않은 금발일 것이다. 눈꺼풀이 들어올려지면 푸른 녹음이 그 안에 있을 것이고, 정갈한 목소리와 어떤 다짐 앞에서 떨지 않으려는 기개 따위를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라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얇은 목을 꺾었다.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적막. 이것이 알렉산드라가 아는 블란카 볼로소자르 레베데바다.

 

 그러니까 뭐라고 했던가, 과거가 물질화 되어 나타난다고 했던가. 정확히는 과거의 편린이던가? 과학에는 별다른 연이 없어 알렉산드라는 솔라리스에 대한 보고를 대충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 정신이상자들을 색출해내면 그만일 것이라고 판단했던 지난 날이 스치고, 그보다 훨씬 지난 날이 스친다. 그날에는 블란카 레베데바가 있었고, 그가 자신을 향해 목을 빳빳이 들고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러시아의 배신자를 만난 날이었다. 우주를 항해하는 배 즈음이야 돈을 쏟아부으면 만들어낼 수 있는 곳에서, 알렉산드라는 모국을 배반한 인간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뻔뻔한 작태에 어떤 수를 내었어야 했는가? 알렉산드라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결코 다른 결론으로 다다를 수 없었다. 죄는 한 번이되 죽음 또한 한 번이며, 러시아의 명예 또한 한 번의 추락을 겪었으므로 마땅히 그리 되어야 했다. 배신자에게 마땅한 말로다. 알렉산드라는 그날에 큰 유감도, 감상도 없다. 그의 손에 무수하게 진 목숨 중 하나일 뿐이므로.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날에 유감이 생긴다. 감상 또한 마찬가지다. 꺾인 목이 제자리를 찾고, 식었던 눈동자가 빛을 되찾음으로 마치 그날에 갇힌 기분으로. 그러나 그날과 같은 색을 가진 눈동자 속에 든 감정은 전혀 다른 것이라, 되살아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이를 심란하게 바라보는 것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샤?”

 

 그가 아는 블란카 레베데바라면 그런 목소리로 그런 호칭을, 그런 식으로 호명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 얇은 검지가 본인의 가슴팍을 가리킨다.

 

 “나를 아나요?”

 

 모를 리가 만무했다. 알렉산드라는 답지 않게 곧장 답하지 않고, 그에게 죽었던 여자는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동시에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도 보여 주었던 그 올곧은 시선으로 답을 기다린다. 네 죄를 모르느냐고 차게 분노하는 이를 앞에 두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어느 때처럼. 그러나 그때 레베데바가 죽었다. 죽음으로 면죄했다. 눈앞의 블란카는, 이걸 블란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죄가 있는가? 알렉산드라는 그 기묘한 상황에서조차 제 잣대를 주조해 만든 천칭 위에 블란카를 올려둔다. 마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어떤 존재를. 판결은 조속히 이루어진다.

 

 “물론이지. 언젠가 함께 아득한 우주를 구경한 적도 있거든.”

 

 눈앞의 존재는 무죄다. 러시아를 배신한 레베데바는 죽었다. 장례는 성대하지 않았을지언정 그의 저명한 아버지 덕에 그의 딸이 안타까운 사고를 당했노라 기자들이 써내린 애달픈 글들을 기억한다. 눈앞의 존재는 솔라리스의 영향으로 인한 정신적인 영향이거나, 혹은 물질화된 흉내쟁이이거나겠지.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눈앞의 존재는 사람의 꼴을 하고 있으며, 사랑하는 모국 시민의 얼굴로, 아직까지는 무해하다는 것.

 

 러시아의 시간으로는 새벽, 불 꺼진 방 안에서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누구죠? 여자가 말한다. 블란카. 대답한다. 블란카가 누구인데요? 여자가 말한다. 괜찮은 금발에, 괜찮은 성격을 한 괜찮은 러시아인이지만 손버릇이 나쁜 사람. 대답한다. 여자는 잠들지 않고, 알렉산드라는 잠들지 않는 방법을 안다. 문답이 이어진다. 그런 것 말고는 없나요? 이제는 없지. 없어진 것들은 말해 주지 않는 건가요? 없어진 것들은 없어졌기에 알 필요가 없는 거지. 필요는 누가 정하는 거죠? 내가. 당신이 무엇인데요? 너를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는 사람. 왜 저를 죽이는 건가요? 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으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건가요? 어리숙한 블란카,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야. 긴 침묵이 방을 가득 채운다. 너무도 길어 그 침묵이 두 여자의 입구멍을 꽉 채워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오래 지속되는 침묵.

 

 알렉산드라는 아침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 되었을 때 블란카를 이곳에 남은 과학자들에게 데리고갔다. 알렉산드라는 연구가 필요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연구가 필요한 것은 블란카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당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록자는 본인이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그가 알아낸 사실 하나. 과거의 기억으로 주조된 것만 같은 이곳의 블란카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정신병 따위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블란카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고, 블란카가 내는 소리에 반응했다. 사실 모두가 미쳐가고 있는 것인가? 레베데바가 아닌 블란카에 대한 처우를 보류하기로 다짐하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몇십 시간 동안에 알렉산드라는 블란카를 나름으로 살뜰히 보살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무죄 판결이 난 블란카가 타지에서 만난, 일과는 완전히 무관할 수 없으나 거의 무관한 러시아인 여자라니, 천천히 제 인생과는 별 관계없는 지식들을 기억해내는 동안에 대화가 통할 법해진 사람이라니, 고루한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과학자들이 아닌 존재라니. 도대체 어느 누가 일면식 하나 없는 재미없는 자리에 던져졌을 때 마주친 흥미로운 사람을 무심하게 팽개쳐 둘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일련의 미약한 촉매와 시간들이 문제였을 것이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되 어쩔 수 없이 아끼고 만 것은. 그리하여 돌아갈 날을 정하고, 프로젝트의 유명무실한 논란 따위와는 무관히 실험으로 하여금 솔라리스에 숨겨진 무언가가 발견되기까지 조금 더 기다려 보면 될 것 같다는 보고를 올리기 위해 펜을 들었던 때까지도 결국 그 나름으로 정이 들어 버리고 말았노라고 순순하게 인정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문제라고 여기는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무슨 수를 썼는지 알렉산드라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뇌파를 솔라리스의 유한한 바다에게 먹였다는 설명만이 그의 기분을 끔찍하게 망쳤을 뿐이었다. 과학자라는 인간들은 이런 것이 문제라고, 그가 기어코 드보르제츠키의 어금니 한둘을 깨 먹을 뻔했을 때, 블란카가 탁상 위에 놓인 잔 하나를 떨어트렸다.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런 곳에 유리잔이 있다니.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은 채 놀란 눈으로 블란카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블란카를 바라본 것은 알렉산드라였다.

 

 “당신은 왜 그러는 거예요?”

 

 볼륨을 낮춘 고물 텔레비전의 스피커를 비집고 나오는 비명소리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질문의 맥락을 알 수 없었던 알렉산드라는 푸른 눈으로 묻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고. 동시에 블란카의 눈에서 원망과 증오, 절망과 우울을 읽을 수 있었다. 대답은 소리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알렉산드라만은 알아들은 눈치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동시에 제 손에 쥔 드보르제츠키의 멱을 팽개치듯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몇 번의 손뼉을 치며 외쳤다.

 

 “진짜 블란카처럼 구는군!”

 “당신은 진짜고요.”

 “오, 맙소사. 물론이지. 하지만 너는 영영 진짜가 될 수 없을 거야, 블란카. 내 기억 속의 ‘그’ 여자인 이상은…….”

 

 동시에 진짜이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알렉산드라가 아끼는 존재는 유순하나 제 줏대가 있는, 이방에서 헤매는 러시아의 여자였고, 블란카에게 블란카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명은 없다. 블란카의 눈이 음울한 기세로 알렉산드라에게 향했다. 벼락처럼 들이친 기억, 혹은 정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것도 같았고, 동시에 자신이 상대에게 그 무엇도 따질 수 없어 억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국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도 내가 진짜가 아닌 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옳지 않아요. 아, 맙소사! 아가씨, 필요한 건 누가 정한다고 말했지? ……당신이요. 그렇다면 옳고 그른 건 누가 정하겠어? ……당신은 진짜 인간이면서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죠? ‘그런 식’이 어떤 식이지? 폭력과 무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하는 것 말이에요. 실제로 해결되었기 때문이지. 동정과 연민, 애정 같은 것들이 당신에게도 분명히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하하, 그만하는 게 좋겠어, 블란카 나도 사람이니 그런 것들이 있지 물론이야 그렇고 말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을 모든 이에게 주어야 하나? 우주에서 태어나 슬라브인 같은 발언이라니, 놀라워. 그 사람과 나는 뭐가 다른가요? 뭐? 진짜는 그 사람이고 나는, 나는 사람에 가까운 사람 아닌 것이잖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당신은 왜 ‘진짜’ 사람들에게만 가혹하죠?

 

 진짜가 아니라면 가혹할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요? 블란카가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마치 모르는 언어를 들은 사람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주는 거의 무한하므로 우주가 낳은 솔라리스의 자식은 조모를 닮아 거의 무한한 의문을 내던지고, 유한한 삶밖에 알지 못하는 알렉산드라는 기어코 대답할거리가 동났음을 깨달았다. 아니, 깨달은 것은 그런 사실 따위가 아니라 가장 단편적이고 나약하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약점의 출아(出芽)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 멀어지는 뜀박질 소리, 하나의 호흡, 두 개의 시선, 하나의 사람, 하나의 결정.

 

 알렉산드라는 끝내 대답하지 않은 채로 제 짐을 챙기러 떠났다. 빈 방에 덩그러니 남은 블란카는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듣지 못해 그곳에 서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타자의 시선으로 본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누군가 열 손가락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분에 안주한다. 열 손가락이 짐을 정리한다. 알렉산드라는 떠나기로 다짐했다. 결론이 났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

 

 테레시코프의 첫째가 얇은 보고서를 훑는다. 단호하고 정갈한 어조들이 사실만을 적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며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그러므로 보고자 알렉산드라 이고레브나 테레시코바는 행성 솔라리스 프로젝트에 대한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해당 프로젝트는 즉각 종료되어야 하며, 실험 외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도록 행성과 프로젝트 자체의 폐기를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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